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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따금 일기/듣고 본 것

[뮤지컬] 미드나잇 : 액터뮤지션

by momorae 2024. 2. 12.

<미드나잇:액터뮤지션>을 보았다. 막연히 올 해 말을 떠올리며 2024년에 꼭 보고 싶은 것으로 꼽았는데 감사하게도 사현님이 손 붙잡고 1월이 시작되자마자 데려가주셨다. 그동안 보지 않았던 공연을 아쉬워하며 바로 한 번 더 예매해서 2회차까지 했다 (2회차 끝나고 나오며 바로 아트원씨어터 계단 내랴가 3회차 하고 싶었다). 진짜 너무 "재미"있었다. 극을 보러간다고 할 때 스스로 기대하는 만족감에는 여러 종류가 있겠지만, 그 중 하나인 "깔끔한 재미", "무대라는 시공간 내에서 완결되는 최대치의 재미" 그 자체였다. 라이브 음악은 듣는 맛이 있고, 연기는 보는 맛, 극본은 말 맛이 있었다. 한편 나는 영화나 극을 볼 때, 같은 이야기를 극으로 또는 영화로 만들 때를 상상하곤 하는데, 피튀김과 잔인함을 지독히도 못보는 나로서는 이 재미난 이야기가 영화가 아니라 극으로 올려져서 내가 놓치지 않을 수 있었던 것 같아 그저 고마웠다.


겁에 질린 자는 잔인해진다.

 

처음 보고 나왔을 때, 어쩐지 드라마 <연인>에 나왔던 이 대사 떠올랐다.


그것은 공포보다는 겁에 가까운 느낌이었다. 공포보다 몸에 훨씬 더 가까이 밀착되어 있어서 도저히 객관화할 수 없는 감상이었다. 언제 어디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식의 서술이 아니라, 당장 내 몸이나 내 존재가 잘못되어버릴 것 같다는, 주관적인 형식의 언어로밖에 묘사할 도리가 없는 사건. (배명훈, 고고심령학자)

 

구/현/워너비/주변부 맑시스트와 직간접적으로 어울려서 그런지 (농담이다) 혁명에 대한 희망(?)이 나에게도 있다. 음, 체제의 전복과 구조의 재편과 같은 급진적인 변화를 하나의 해결책이나 선택지로서 포함할 수 있다. 다만 최근 몇 년 그런 격동의 시기에 여성으로서 내가 과연 무사하게(?) 지나올 수 있을지 실존적인 공포를 느낀다. 전복의 대상으로서 끌어내려지거나 내가 지금 당연히 누리는 것을 내려놓는다거나 하는 게 무섭다기보다. 힘과 에너지의 구도가 바뀌는동안 용인된/묵시된 폭력과 무질서를 기회삼아 다른 폭력을 자행할 존재들이 있다는 걸 온 몸으로 느끼게 되는 일이 너무 많았다. 작년 어느 출근길에 러시아 군대가 휩쓸고 지나간 우크라이나의 폐허의 마을에서 여성에게 벌어진 폭력을 숨어 목격한 다른 여성의 인터뷰를 팟캐스트로 들었을 때 겁에 질려 몸이 굳었다. 아 어떤 것들이 몰아치는 자리에는, 무너지고 전복되는 자리에는, 다른 광기와 폭력이 머물기 너무 쉽구나. 숱한 집회 현장에서 묵과된 차별과 폭력을 안다. 맞서고 비판하기 이전에 매우 주관적이며 자폐적인 상태에 도착해버린다. 이렇게 내가 겁이 많아 과연 보수화되는가, 라는 고민을 안고 있을 때, 어떤 격동적 시공간에서 비겁한 광기나 폭력이 아니라 오래 가둬온 진짜 잔인함과 무자비함을 비로소 드러내며 해방되고, 그래서 살아남는 여성을 보는 쾌감, 짜릿함이 있었다, 이 무대와 객석에.


 

다른 한편, 나는 이 극이 1937-38년 엔카베데의 지독한 감시가 이루어지는 역사적 배경은 거들 뿐, 현재까지도 유효한 '부부'에 대한 짖궂은 농담같기도 했다. 먹고 살기 위해서라는 말로 집 바깥에서 각자가 무엇까지 하는지 가장 보이고 싶지 않은 건 누구일까. 부모와 자식은 서로 그것을 보여주기도 하지만, 남과 남으로 이루어진 '부부'는 서로를 위해, 또는 자기 자신을 위해 상대에게 철저히 숨기고자 애쓴다. 특히 가치나 지향을 공유한다고 선언한 부부일수록 바깥에서 자신의 타협적인 모습을 파트너에게 보여줘야하는 건 정말이지 끔찍한 일일 것이다. 집 바깥에서의 자신, 낮 시간이 가장 숨기고 싶었던 이 앞에서 폭로되고 까발려질 때, 분개하고, 부정하고, 설득하고, 지치고 꺼져가는 시퀀스를 지켜보는 것이, 그 속에서 악을 쓰는 맨과 우먼을 보는 것이 지독하지만 재미있었다 (쓰고 보니 나 좀 악취미인가).

그리고 나는 대부분 이 '(헤테로) 부부' 관계에서 여성들이 남성들보다, 생존을 욕망하며 살아남기 위해 어디까지 잔인해질 수 있는지 그 모습을 절대 드러내서는 안된다는 압박을 더 강하게 받는다고 생각한다. 스스로든, 사적인 둘이 관계에서든, 둘이 포함된 가까운 공동체나 또는 사회적으로도 온갖 결박이 둘어진다. 그래서 '맨'이 그랬듯 대부분의 남성들은 자기네 와이프들의 깊은 곳에 존재하는 잔인함을 상상조차 못하고, 알게되었다한들 사실을 받아들일 능력이 없다 (그래서 죽지.) 무튼 이 지점에서 초반부 '우먼'의 어색할 정도의 "기계적인 착함", "강박적인 인간성"이 "흉내"가, 왜 어색할 정도였는지 이해할 수 있었고 그게 너무 좋았다. 고대 그리스의 우먼부터 오늘날의 집집마다의 우먼들 모두 표독스럽고 악착같은 악처가 되지 않으려 어색한 연기들을 분명 펼치고 있으니까. 어느순간부터 드러난 못됨을 굳이 숨기지 않아도 되자 옆에서 어쩡쩡하게 서있는 맨을 거들떠도 보지 않고 "(시체처리 같은 것은) 내가 해"라며 이를 악무는 우먼의 진짜 표정에서 신이 날 정도였다. 지난 십 몇년동안 종종 '맨'이 그렇게 답답한 순간이 참 많았겠지.


 

처음 보고 나왔을 때부터 계속 궁금했다. '우먼'은 무지하기를 의식적으로 선택한걸까, 혹은 자연스럽게 무지한 상태가 된걸까. 둘의 첫 만남에서 우먼은 전단지를 나눠주고 있었다며, 그 전단지의 내용이 무엇이길래, 저 여자가 아마 작위가 있었을, 그리고 부르주아였을 아비와 그의 생존방식에 대하여 고연 모를 수 있었을까. 의식적으로 선택한 무지이든, 무의식적으로 이루어진 망각이든, 우먼이 비지터의 눈알을 뽑을 정도로 잔인할 수 있었던 것의 근원에는 그 무지로 인한 '겁'이 있었겠다는 생각이 어느새 들었다. 나의 가장 여리고 순하고 소중했던 시기가 대다수에 대한 처절한 착취 위에 세워져있다는 사실을, 내가 그걸 어렴풋이 느끼거나 또는 정확히 알고 있다는 사실을 들길까봐, 누군가가 알게 될까봐, 평생 겁을 먹고 살았나보다, 하고. 그걸 숨기고 해맑게 살아가려는 이상 더더욱 공허한 착함밖에 재현하려할 수 밖에 없고, 언제든 바들바들 떨 수 밖에 없겠다.



감추던 모든 게 들통났다. 아내로서도, 착취자의 딸로서도. 오래 먹었던 겁내던 상황이 벌어졌고, 겁냈던만큼 한껏 잔인함을 펼쳐보이기도 했다. 잔인한 모습을 숨겨야할 이유가 사라졌다. 이것도 해방일까. 허깨비같이 춤추긴 했지만 정말 악마에게 영혼을 빼앗겨 조종당하기보다, 오래 묵혔던 것들, 봉인된 것들이 한차례 쏟아져나와 일단 비워진 상태로 다가왔다. 다음의 우먼이 과연 어떻게 살지 기대하게 되었는데, 비지터를 따라 다니며 다른 집 문을 노크하며 살아도 되지 않겠나, 다른 우먼들을 깨우러 가도 되지 않겠나 하는 상상도 잠깐 했다.


 

볼셰비키 혁명이 1917년이었으니까, 엔카베데가 창설되고 대숙청의 시기인 1937년까지 대략 20년. 20년이라는 시간이 지났고, 딱 20년만큼의 나이를 더 먹었으며, 결혼 생활도 몇 년 덜이든 몇 년 더든 그정도 지났을 것이라는 점이 이 모든 이야기에 설들력을 준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충분히 나이먹은 중년 남성의 외관을 한 박유덕 배우의 '맨'이 좋았다. 나에게 말갛고 하얗고 앳된 '맨'은 그려지지 않는다. 그는 혁명 이후 오래 천천히 부식되어있었어야한다. 가족과의 행복한 삶을 그리며 참가했던 혁명에 대한 기대도 함께 부식되어있을만큼 그 자체로 나이 들어야한다. 보고 나와서 맨, 우먼, 비지터의 연령대와 성별을 다르게 조합하여 상상하는 재미가 있었다. 맨은 위 이유로 다른 연령대는 굳이 상상하고 싶지 않다. 그 당시 높은 자리의 남성들답게 와이프는 좀 더 작고 여리고 순진하고 "어린" 여자애일 수도 있겠지. 어린 여자애가 해방되어 남편을 바들바들 떨게하는 것도 재미있겠다. 물론 나는 홍륜희 배우도, 그의 '우먼'이 너무 좋다. 오랫동안 참아올수록 그리고 더 예전 여자일수록 제약은 클 것이다. 한편 박유덕 배우와 다른 배우들의 비지터 영상을 여럿 보며 침흘리긴했지만서도, 기왕이면 어떤 여자가 해방될 때 각성이자 계기가 기왕이면 여성인 쪽이 더 좋다. 자주 보기에 부담이 없다. 제가 편협하다구요? 네, 기꺼이. 길쭉길쭉하고 오똑하고 눈썹이 짙은 잘생긴 여자라니, 정인지 배우의 비지터 여러번 반하고 왔다. 무튼 박유덕배우, 홍륜희배우, 정인지배우가 모두 좋아서 이들 모두 맨, 우먼, 비지터를 보고 싶어졌다. 박유덕 배우의 우먼도 보고 싶고, 정인지 배우의 우먼과, 홍륜희 배우의 맨도 보고 싶습니다. 너무 재미있을 것 같아!


 

확실히 두번째 보러갔을 때 '그날이 찾아왔어' 첫 소절부터 빠짐없이 가사가 생생하게 들려 좋았다. 나는 역사를 좋아하기에 비록 머리가 좋지 않지만, 거리를 두고 거대한 흐름을 한 번에 바라볼 때 반복되는 패턴을 발견하고 이를 정확하게 기술하는 일을 늘 경이롭다. 그저 감탄이 나온다. 결코 새로운 일이 아니며 반복되고 있다고 말하는 노래를 좋아하지 않는 방법이 있나. 나는 <노트르담 드 파리>의 2막 오프닝인 '플로렌스'를 1막 오프닝인 '대성당들의 시대'보다 훨씬 더, 오래 좋아해왔는데, 간만에 이만큼이나 마음을 빼앗기고 계속 흥얼거리게 될 오프닝을 찾았다는 걸 처음엔 믿을 수 없었다. 하지만 너무 좋네요 엉엉.


 

두번째 보러갈 땐 무대를 바라보고 좌측과 우측에 각각 표가 남아있었는데, 자첫을 좌측에서 했으니 이번엔 우측에서 보자하는 마음에 우측표를 골랐다. 다만 무대 우측의 식탁에 앉아 무대 나머지를 바라보며 연기하는 것을 보려면 그 나머지 쪽에 앉아있어야한다는 것을 바보같이 다 보고나서야 깨달았다. 이렇게 또 한 번 배운다. 처음이고 비지터를 더 재미있게 보기엔 좌측이 더 좋을 거라며 표를 쥐어주셨던 사현님께 다시 한 번 무한 감사.


 

두 번 본 게 아쉬울 정도로 1월 내내 재미있게 곱씹었다. 영화였다면 그냥 어느 주말 낮 심심하면 틀어놓는 레파토리가 되었을 것이다. 근래 리터럴리 건강한 흥분, 도파민이 돌았던 극이라 올 때마다 챙겨서 보고싶을 것 같다. 아주 재미있었다, 굳굳.

 

0117 캐스팅보드. 0113에는 플레이어가 달랐다 (박혜민, 정우림, 한희도, 권혁준, 김병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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