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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따금 일기/별책 부록이 진짜5

책장의 시간 우리 집엔 책이 많다. 책을 좋아하는 두 사람이 살고 있으니까. 다만 '다독자'라거나 '애독자'라기보다 좋게 말해 '애서가'로 '책(冊)' 자체에 방점이 찍혀있다. 거칠게 말하면 '책 호더(hoarder)'에 가깝다. 처음부터 그저 모으기만 하는 미련한 사람은 아니었을 것이다. 대문자 I 성향의 겁이 많은 사람답게 활자 읽기를 좋아했다. 말보단 글이 편했고, 책은 좋은 놀잇감이자 방어구였다. 모은만큼 읽어가며, 아니 읽은만큼 모아가며 그렇게 자라 진로를 고민하고 직업을 결정해야할 때 친숙한 것에서부터 시작하자면 '책'에서부터였다. 문과 출신으로 '물성'이 있으며 '디자인'이 있는 것을 만드려면 '책' 뿐인 것 같았다. 쓰는 것을 꿈꾸지 않았다면 거짓말이겠지. 편집학교를 기웃거린 적도 있지만 편집자가 되진.. 2024. 4. 22.
주년 기념글은 아닌 끄적임 타겟팅 광고에 대한 생생한 첫 기억은 어느 밤 반려인과 나란히 누워 각자 웹툰을 보던 때이다. 각자의 핸드폰으로 같은 웹툰을 보고 메인 페이지로 돌아나왔는데 흘깃 본 반려인의 핸드폰 하단 부분에는 특정 직업군의 여성 회원이 많다는 결혼정보회사 배너 광고가 있었다. 순간 확인한 나의 화면에는 같은 자리에 전혀 다른 쇼핑몰 광고가 있었다. 우리가 무의식적으로 스치는 많은 풍경이 이렇게까지 다르구나, 당시 기준 20대 남성인 나의 반려인, 그리고 숱한 20-30대 남성들은 저런 특정 직업군과 여성을 대상화하는 카피에 늘상 자연스럽게 노출되고 있겠구나, 하며 놀랐다. 우연히 광고/마케팅 관련 회사에 들어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더 정교한 타겟팅, 더 꼭 맞는 쇼핑 정보를 전달하여 클릭을, 검색을, 구입을 유도.. 2023. 12. 7.
글쓰기에 대한 이런저런 생각 재수학원 담임은 '철학자들이 얼마나 재미있는 사람들인 줄 아느냐'며 '철학은 글로 하는 전쟁이다'라고 말했다. 잘 벼른 글을 나의 무기로, 나의 입장으로 내세우는, 나의 전선. 내세울 것은 그것뿐인 나의 결투. 대학 가서 읽고 쓰는 과제가 많은 수업을 골라들었다. 소위 "개꿀"인 널럴한 수업보다는 적당히 "빡센" 수업을 좋아했고, 조모임이나 발표보다는 차라리 매주 쪽글을 내거나 학기말 페이퍼를 내는 수업을 선호했다. 글 쓰는 게 결코 재미있거나 쉽지 않았지만 그 고생과 고통이 내가 자발적으로, 앞으로 아주 오랫동안 선택하고 싶은 종류의 것이었다. 또 대학원 진학을 생각하고 있을 때 나는 결국 글의 형태로 표명하고, 밝히고, 세우고, 밥 벌어먹고 사는 삶을 선택한다고 믿었던 것 같다. 한 주에 수업당 1-.. 2023. 8. 19.
[계절성 음주주의보] 꿉꿉한 여름날에는. 계절성음주주의보 #1. 첫번째 이야기 술을 고르는 기준, 술을 추천하는 글에 대한 제안을 받은 순간 두근거렸지만 당황했다. 맛있는 술을 만나는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 수 있는 글을 써야할 것 같은데, 그 많은 것들이 아직 새롭고 그만큼 고심하며 하나하나 고르고 맛보며 내 호불호를 탐색하고 기준을 마련해나갔던 시절은 너무 오래 전이고, 이제 몸이 고르고 있던 지 오래였기때문이다 (물론 여전히 세상에 먹어보지 못한 술은 많고, 진짜 애주가와 미식가들이 있으므로 이렇게 말하기 무척 부끄럽긴하다). 작년에도 어느 모임에 들고갈 맥주를 고르면서 단골 바틀샵 사장님과 한참을 논의했지만 “이게… 초심자들이 먹기에 많이 시고 쿰쿰했던가요?(람빅)”, “이게… 도수가 높고 술맛이 세게 느껴졌었나요?(고도수 트라피스트)”.. 2023. 6. 26.
달리기를 시작하시겠습니까? 서른이 되던 해 새롭게 좋아하게 된 것에 대하여 주의: 달리면서 생각만 하고 적지 않은 것들이 일년 반 치나 쌓였고, 이들을 한 번에 적느라 글이 매우 길다 1년 전 봄, 5월 23일은 올해보다 좀 더 덥고 습했던 것 같다. 3월 31일 첫 달리기를 시작한 지 약 두 달, 15번째 달리기를 하는 일요일, 드디어 목표했던 5km를 달려보는 날이었다. 내가 살고 있는 동네의 천변을 누리는 어린아이와 강아지가 얼마나 많은지, 계절의 변화란 게 얼마나 투명하게 바람에 담기는지, 그만큼 이상기후란 건 달리기 힘든 날씨로 얼마나 빈번하게 나타나는지, 달리기를 통해 새삼스레 깨달을 수 있었다. 달리는 동안엔 다음 곡 재생을 누를 겨를조차 없었는데, 그랬기에 예전에 참 좋아했던 노래를 오랜만에 다시 들으며 그때 내가 .. 2023. 6. 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