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이 되던 해 새롭게 좋아하게 된 것에 대하여
주의: 달리면서 생각만 하고 적지 않은 것들이 일년 반 치나 쌓였고, 이들을 한 번에 적느라 글이 매우 길다
1년 전 봄, 5월 23일은 올해보다 좀 더 덥고 습했던 것 같다. 3월 31일 첫 달리기를 시작한 지 약 두 달, 15번째 달리기를 하는 일요일, 드디어 목표했던 5km를 달려보는 날이었다. 내가 살고 있는 동네의 천변을 누리는 어린아이와 강아지가 얼마나 많은지, 계절의 변화란 게 얼마나 투명하게 바람에 담기는지, 그만큼 이상기후란 건 달리기 힘든 날씨로 얼마나 빈번하게 나타나는지, 달리기를 통해 새삼스레 깨달을 수 있었다. 달리는 동안엔 다음 곡 재생을 누를 겨를조차 없었는데, 그랬기에 예전에 참 좋아했던 노래를 오랜만에 다시 들으며 그때 내가 왜 이 노래를 좋아했는지, 그리고 왜 시들해졌는지를 기억해낼 수 있었다. 이 봄은, 몇몇 음색과 타닥타닥 발과 지면이 부딪히는 소리, 그리고 내 숨소리와 바람 소리의 중첩으로 기억되겠구나. 그래서 “지금까지 달린 거리는 오, 킬로미터, 입니다.”라는 기계음이 나올 그 순간에 어떤 노래가 재생되고 있을지 따져 플레이리스트를 구성하는 것은 매우 중요했다. 페이스와 평균 곡 길이로 대충 계산하여 재생목록을 꾸리고, 드디어 재생 버튼을 누르며 몸 앞쪽으로 무게를 싣고 한 발을 디뎠다.
달리기를 함께 하자는 반려인의 제안에 손사래를 쳤다. 이 친구가 좋다고 하는 것, 함께 하자고 하는 것은 어지간하면 일단 해보는 편인데 달리기라니. 옛날 엄마의 한 마디인지, 중학교 체육 시간의 점수인지, 마땅한 근거는 희미하지만, “나는 달리기는 꽝이다, 폐활량이 정말 평균 이하, 최하위이다.”라는 사실만 선명하게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달리기를 하면 내 폐는 찢어지고, 심장은 터져버릴걸. 사실 반려인 이외에도 주변에서 달리기를 권하는 사람들이 최근 몇 있었는데, 내가 그들과 같이 ‘뛸 수 있는 사람’이라고는 결코 상상조차 해본 적 없다. 고작 서른이지만, 서른쯤 되니 ‘이건 이번 생의 나에겐 없다.’ 하는 것들이 있기 마련이고 나에게 달리기는 그런 ‘없는’, ‘없을’ 것이었다. 그런데 결국 왜 뛰었더라, 길고 긴 반려인의 설득 때문이었나, 아니면 한 달 남짓 다니던 요가마저 흥미를 잃은 것에 대한 위기감이었나. “1분만 뛰어도 돼.”라는 반려인의 말에 “아냐, 나 30초 뛰고 너무 힘들면 난 안 뛸 거야.” 하며 투정을 부리며 신발 끈을 묶었던 것 같다.
처음 30초는 정말 찢어지고 터지는 줄 알았다. ‘30분 달리기 완성’이라는 프로그램 이름이 무색하게 30분은 무슨, 2분조차도 아득해 보였다. 그런데 30초만으로 마치 막 마라톤을 완주하고 들어온 사람처럼 탄천에 드러눕고 싶을만큼 힘들다는 것이 부끄럽거나 한심하기에 앞서 ‘달린다’는 것 자체가 생경하다는 감각이 더 큰 충격이었다. 생애 처음 달려본 사람처럼 내 몸이 낯설었다. 돌이켜보니 ‘달려본’ 가장 최근의 기억은 잘해야 중학교 운동장의 풍경이었다. 알바 시간에 맞추느라 동동거리며, 또는 동아리 행사 준비를 하며 종종거린 적이 있고, 회사에서도 급한 마음에 옆 사무실로, 아래 협업부서로 총총거렸던 것 같은데 “뛰어다님”과 “달림”은 결코 달랐다. 발을 굴러 달린다 – 라는 게 낯설었다. 굽이 없는 편한 신발로 발바닥 전면을 차례로 지면에 굴리고, 그 동력으로 두 다리가 규칙적으로 교차하고, 두 다리가 나의 몸을 앞으로 들어 옮기고 있었다. 내 몸에 ‘동력’과 ‘속도’라는 게 흐른다는 게 아찔했다. 죽을 것처럼 힘들긴 했는데, 거칠게 쿵쾅대는 심박동 아래 말간 두근거림이 단단하게 자리잡고 있어서, 결국 런총각(런데이 어플 프로그램의 초 긍정 남성 코치 나래이션의 별명)의 말대로 하루를 잘 쉬고, 그 다음날 잘 달릴 준비를 할 수밖에. 어느덧 매일이 선선하고 땅이 잘 굳은 좋은 날이길 기도하고 있었다.
그렇게 8주에 걸쳐 30분 달리기 완성 코스 프로그램의 절반을 성공했다. ‘30분 달리기 완성 코스’는 8주 총 24회 코스로 계획되어 있는 프로그램이었는데, 딱 12번째의 코스를 진행했으니 딱 절반이다. 왕복 3시간 10분의 통근을 하고 가끔 야근도 하는 직장인이니 이 정도면 스스로를 더 다그치고 싶진 않았다. 그 와중에 프로그램 이외 자유 달리기 코스도 두어 번 해봤고, 일단 꾸준히 한 종류의 운동을 하다니 충분하고, 대견하다. 그리고 조만간 프로그램을 완주할 것이고, 계속하여 뛰고 싶다는 마음이 있다. ‘해봤다’라는 스스로 납득할 만한 경험의 근거가 있다는 게 얼마만의 성취감인가. 의지가 있고, 의향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오랜만의 설렘인가. 더욱이 이건 회사로 인한 어떤 강제도, 불안함을 동력 삼은 동기부여도, 월급쟁이의 발악도 아니다. 그 정도를 하고 5km 자유달리기를 앞두고 있다. 그 뒤 나는 4주를 더한 6월 말 즈음 프로그램을 완주했다. 30분을 쉬지 않고 뛰었고, 그러기 얼마 전엔 좀 이른 여름 휴가지에서 또 25분을 달렸다. 그 뒤엔 좀 더 멀리, 지하철 몇 정거장을 달리고, 판교까지 한시간 남짓 오래달리기도 하였다.
달리기를 하게 되며 얻게 된, 꽤 괜찮은 마음가짐이 있다. 안 뛰면 뭐 할 건데, 딱히 할 것도 없다면 짧게라도 한 바퀴 얼른 뛰고 오자 – 하며 “읏챠”하고 몸을 일으키는 마음. 사실 작년 나는 전혀 계획도 예상도 하지 못한 채 갑자기 워라밸을 찾게 되었는데, 이 잃어버렸던 저녁이 공백의 모양으로 성큼 삶에 들어오자 도무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 지 몰라 제법 헤매고 있었다. 일하느라 못 읽고, 못 듣는다고 생각했던 책도, 강의도 도무지 떠오르지 않았다. 각종 OTT 서비스의 1분 미리보기만 반복재생하고, 그러다 (그러면 안 되지만) 심심해서 맥주 한 캔을 더 따곤 했다. 그동안 운동을 한다는 건 왠지 ‘요일을 정해 놓고 하는 것’이라 월요일부터 하자, 아냐 다음 주부터 화목토에 하자, 식이어서 그냥 한다, 라는 것은 없었다. 그런데 달리기는 그냥 운동화를 갈아 신고, 예약도 수업 시간도 맞출 필요 없이 요 앞에 나가서 하고 싶은 만큼만 뛰고 오면 되니까-하고 가볍게 나설 수 있었다. 또 달리기 좋은 날씨일 때 달려야 한다는, 이 날씨와 시간을 지금 누릴 수 있을 때 누리면 그것으로 족하다는 마음이 컸다. 그렇게 달리고 오면 ‘할 게 없는 저녁에는 일단 달리면 그것이 최선이자 최고’라는 경험이 쌓였다. 달리느라 못한 것도 없고, 그래서 아까워할 것도 딱히 없다는 앎이 차곡차곡 쌓이자 “시작”에 두는 무게를 한결 가볍게 할 수 있었다.
달리기의 두 번째 좋은 점은 새로운 여행 프로그램이 생겼다는 것. 반려인과 여행을 간다면, 여행지의 박물관, 미술관, 독립서점, 그리고 양조장을 검색하는 편이다. 그런데 여기에 “달리기 좋은 코스”가 추가되었다. 적당한 곳을 찾기 위해 예전 이 지역에서 마라톤이나 달리기 대회가 열린 적은 없는지, 코스는 어땠는지, 바다를 보며 달리는 곳은 없는지 찾아보는 재미가 생겼다. 낯선 곳의 달리기를 준비해야 하는 만큼 반려인과 머리 맞대고 지도와 위성뷰를 꼼꼼히 들여다본다. 달리기 전날에는 과음할 수 없으니 건강한 식사를 찾게 되고, 아침에 일찍 일어날 계획을 짠다. 그 많은 여행 관련 수필에 왜 달리기가 적혀있었는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고, 출장 갔던 비즈니스 호텔에서 마주친 투숙객들이 왜 달리기라도 꼭 챙겨해야했는지 이제서야 이해된다. 코로나19 전의 여행지와 출장지에서 달리지 못한 골목과 풍경이 아쉬웠다. 여행 짐은 가벼운 게 최고지만, 달리기를 위해 운동화 한 켤레 더 챙기는 것은 충분히 기껍다. 낯선 곳을 내 발로, 그리고 내 속도로 누려보는 기회를 놓칠 수 없다. 그렇게 예전 장거리 연애의 추억(이라고 쓰고 흑역사라 읽는다)이 쌓인 대전의 갑천에 새로운 추억을 덮어 그렸고, 가을엔 강릉의 경포호를, 다시금 봄엔 거제의 산달도를 달리며 낯선 땅을 단단하게 밟아보았다.
하지만 달리기의 가장 큰 장점은, 달리기를 통해 내 속도에 오롯하게 집중하는 감각과 연습이다. 결코 빨리 달리는 게 아니라 계획한 시간동안 일정한 속도를 바른 자세로 유지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그래서 숨을 규칙적으로 고르고, 허리와 등을 펴고, 시선을 적당히 멀리 두고, 적정 보폭으로 다리를 움직이고, 팔을 흔드는 것, 흐트러지지 않고 빨라지거나 늦춰지지 않을 것에 집중하다보면 어느새 머리 속이 텅 빈다. 또 속도라는 건 이동시간이나 이동거리를 모두 셈하는 것이라, 시간만 짧다고 또는 거리만 멀다고 가치를 두지 않는다. 시간과 거리를 모두 가늠하여 속도를 계속 감각해보려한다. 곧게 뻗은 도로에 승차감이 좋은 자동차로 접어든 것처럼 안정적으로 나아가다보면, 하루 삶살이의 속도도 정돈되는 기분이 찾아든다. 오늘 하루 나를 조급하게 했던 쏟아지는 일들이나 쓸모없는 후회나 갑작스러운 자격지심 같은 것들의 무게가 한없이 가벼워져 훌훌 흩어졌다. 그리곤 달리기 속도 뿐 아니라, 내 생활의 속도나 삶의 속도는 어떠한지, 충분히 일정한지, 끝까지 유지할만큼 지속가능한 속도인지 생각해보게 되는 것이다. 비록 달리기가 끝나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면, 쉴 새 없이 쳐내면서도 마음은 늘 동동거리는 그 상태로 돌아가겠지만. 달리기는 일종의 주기적인 해독이었다. 내 속도를 점검하고, 너무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게, 내 속도를 자책이나 타박하는 게 아니라 존중하는 시간.
5km에 접어들 때 맞추어 재생된 노래는 브로콜리너마저의 <서른>. 마침 작년에 나는 서른이 되었는데, 이 노래를 한참 들었던 29살의 나는 내 서른에 내가 이렇게 평일 저녁 달리고 있을 거라곤 전혀 상상도 하지 않았었다. 이 봄을 틈틈히 달려 지나오는동안, 이 시간에 이렇게 달리고 있는 내가 가끔은 믿기지 않아 얼떨떨하고, 가끔은 ‘참 운이 좋았다’하고 감격하곤 했었다. ‘이런 속도로 살아도 괜찮아’ 수준으로 아주 마음 놓고 안심하진 못했지만, 이 속도로 지날 때 누릴 수 있는 것들 - 우리 동네 탄천이 얼마나 좋은지, 반려인과 계절과 바람을 틈틈히 누리는 게 얼마나 소중한지 등 - 이 분명 있다는 것을, 이 속도를 유지하는 것이 인생의 목표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새로 배웠다.
결코 빠를 필요는 없다. 오래 달리고 싶다면, 멀리 가고 싶다면, 지금 좀 아픈 것 같다면 오히려 속도를 늦춰볼 것. 나에게 익숙한, 나에게 편안한 속도를 찾아 그것을 달리는 내내 바른 자세로 유지할 것. 적당한 속도란 옆 사람이랑 가벼운 대화를 할 수 있을 정도 - 런총각이 말하는 달리기란, 사실 동서고금에 나오는 숱한 인생의 이치와 닮은 데가 있어서 처음엔 웃음이 나왔다. 그럼에도 맞는 말이라 이 파이팅 넘치는 자기계발서 같은 말들이 그다지 거슬리지 않는다. 주 2-3회 욕심을 내지 않고 일정한 속도로 30분을 달리면, 그 저녁의 속도가 또 허겁지곤 살고 있던 이삼일의 낮의 반대에 자리 잡아 전체 평균 속도가 일정 수준으로 맞춰진다. 속도를 해치고 마는 마음의 독기가 빠진 그 순한 상태의 스스로가 신기하고 좋아서, ‘오늘은 이만 퇴근’이라고 가뿐하고 당당하게, 사무실을 나선다.
2022.0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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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 강릉, 강원도, 2022 / 경포 마라톤 대회 10km 완주 후 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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