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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따금 일기/별책 부록이 진짜

글쓰기에 대한 이런저런 생각

by momorae 2023. 8. 19.

재수학원 담임은 '철학자들이 얼마나 재미있는 사람들인 줄 아느냐'며 '철학은 글로 하는 전쟁이다'라고 말했다. 잘 벼른 글을 나의 무기로, 나의 입장으로 내세우는, 나의 전선. 내세울 것은 그것뿐인 나의 결투.
 
대학 가서 읽고 쓰는 과제가 많은 수업을 골라들었다. 소위 "개꿀"인 널럴한 수업보다는 적당히 "빡센" 수업을 좋아했고, 조모임이나 발표보다는 차라리 매주 쪽글을 내거나 학기말 페이퍼를 내는 수업을 선호했다. 글 쓰는 게 결코 재미있거나 쉽지 않았지만 그 고생과 고통이 내가 자발적으로, 앞으로 아주 오랫동안 선택하고 싶은 종류의 것이었다. 또 대학원 진학을 생각하고 있을 때 나는 결국 글의 형태로 표명하고, 밝히고, 세우고, 밥 벌어먹고 사는 삶을 선택한다고 믿었던 것 같다.
 
한 주에 수업당 1-2개의 아티클은 읽었어야하고, 1개가 최소 20-30페이지라고 하면, 그리고 그런 수업이 6개 중 4개였다고 하면, 매주 240여쪽을 읽었구나 이제서야 셈하게 된다. 그리고 보통 한 수업 당 쪽글은 2천에서 3천자 내외 분량이었으니, 매주 최소 8천자를 써냈었다. 여기에 10-20페이지의 학기말 페이퍼를 더하면. 그렇게 한 학기를, 4년을 살았으니 당연히 그 땐 읽고 쓰는 근육이 붙어있었구나 싶다.
 
그렇게 셈하니 지금 직장인으로서 글쓰기가, 아니 읽기조차 막막하게 느껴지는게 당연하다. 근손실도 이런 근손실이 없네.
 
대학생일 땐 페이스북이 유행이었는데, 유행인 것을 감안한다해도 나는 꽤 긴 글을 자주 쓰는 헤비유저였던 듯 싶다. SNS에 올리는 포스트는 글이라기보다 말이라고 생각하지만, 나는 종종 글노트로 활용했었다. 그런데 그도그럴게 저렇게 인풋이 있으니, 과제 주제 또는 형식에 맞게 2천자의 아웃풋을 내어도 미처 하지 못한 말이 많았었을 수 밖에. 좋은 글을 쓰기 위해 편집되거나 덜어내진 부스러기들. 그리고 쓰는 근육이 단력되었던만큼 어렵지않게 순식간에 토토토 써낼 수 있었겠지.
 
예술가의 기질이나 창작자의 능력은 전혀 없지만, 어쩐지 심심풀이로 사주나 점을 보면 (또는 엄마가 내 걸 보고온 이야기를 전해들으면) 손 끝으로 뭔가 창작하며 살라고. 그게 뭔지 모르겠으나 일단 그림이나 공예보단 글이 편하고 가장 돈이 덜 글고 바로 할 수 있으니까, 요샌 일기라도 다시 써봐야지 한다. 이게 나를 살릴까, 희미하게 기대하며. 하고 싶은 말을 정리하고, 단어를 엮어 문장을 짜는 일. 머리만으로는 되지 않는다는 것, 근육이 움직이듯 몸에 베어야하는 일이라는 걸, 매 시도할 때마다 느낀다.
 
대학생 때는 발제를 해야했기에 "그래서 지금 하고 싶은 말이 뭐야?"를 계속 되물으며 썼다. 어른이 되어 수행하는 이 목적도 대상도 없는 글쓰기도 과연 그렇게 물어야하는 건지 잘 모르겠다. 그렇게 물으면 딱히 하고 싶은 말이 없어, 굳이 써야할 말이 없어 못 쓰겠다. 하지만 그렇게 물으며 쓸 때 많은 걸 아쉽지 않게 덜어내며 좀 더 뚜렷하고 명징한 글을 쓰고, 잘 된 구조의 글을 지을 수 있었던 것 같아서, 과연 이런 질문 없이 잘 쓴 글을 만들어낼 수 있을까 싶다.
 
일단 인풋을 많이 넣어야지. 즉 쓰는 사람 이전에 독자가 되어야겠다는 생각도 한다. 확실히 요새 독서량이 좀 높아지니 자연스럽게 쓰고 싶은 게 좀 생기는 것 같기도. "와 대박" 또는 "와 구려"라고 말하는대신 무엇이 좋거나 싫었는지 잘 정리하여 기록해두자, 라고 결심하나 늘 게으르다. 생활이 단순해지고 만나는 사람도 좁아지면서, 또 회사에서 연차가 올라가는 등 더 간편하게 말해도 적당히 알아들어주는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구체적으로 적확하게 표현하는 방법을 쉽게 잊어버리고 있구나 싶어 섬칫했다. 사실 남편과도, 친구들과도 이제 너무 잘 동기화되어 "척하면 척"이라는 장점을 누리며 한결 편하고 덜 힘들게 지내지만, 동시에 어떤 뒷면에선 타자에게 새롭게 설명하고 이해시키기 위해 골몰하는 능력이 퇴화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한편 여전히 나무에게 미안하고, 탄소를 낭비하는 게 아닐까 싶고.
 
읽고, 보고 글을 쓸 때 그 읽고 본 것이 글쓰기의 주재료라면, 좋은 맛을 내는 글이 되기 위해서는 부재료를 찾는 노력이 필요하다. 최소한의 사실관계를 확인하거나, 별도로 인용하거나 감상을 엮을 만한 것, 예전에 읽었던 책을 잠깐 다시 뒤적이거나 하는 등의 추가적인 검색과 찾아읽기. 생각해보면 학생 때는 과제로 나온 아티클은 물론 함께 엮을 다른 글과 콘텐츠, 기사를 찾는 시간을 당연하게 가졌다. 그리고 지금은 그것까지 하기엔 시간이 없지 - 라는 핑계로 귀찮아하지. 최근에 황정은 작가의 <일기>를 읽으며 황정은 작가에 대해 무언가 느낀 점을 쓰려면 <디디의우산>이나 <연연세세>를 다시 찾아봐야지, 라는 생각이 들어 책장 한 켠에 오래전 자리잡은 친구들을 다시 꺼냈다. 다시 읽는데 새삼스러웠고, 그 시간 자체가 즐거웠다. 이런 수고로움(?)을 더욱 성실히 해야 무언가를 쓸 수 있지 않을까. 써냈을 때 덜 부끄럽지 않을까.
 
중학생 때인가 텍스트에 대한 비평은 내재적 관점의 비평과 외재적 관점이 비평이 있다고 배웠다. 어쩐지 지난 이십대동안 나는 줄곧 외재적 비평의 글쓰기를 훈련받았던 듯 하다. 문대와 사회대의 차이는 어쩌면 그것일까(물론 아님). 직장인이 되어서, 결국 소비한 콘텐츠에 대한 글짓기가 가장 접근성이 낮은 요즘, 텍스트 내부에 대한 깊고 촘촘한 감상과 비평의 능력이 가끔 부럽다. 인물과 인물, 관계성과 표현방식, 비유와 상징에 대해 예리하게 포착하고 감상문을 써내는 글들이 참 어렵다. 나는 사회적 맥락에서 재현의 방식을 먼저 떠올리며, 익숙하게 바깥에서 바라보게 된다. 텍스트 안을 들여다보며 풍부한 이야기를 구성하는 것이 어색하다. 그냥 존잘 덕후님들의 글이 부러운건가 허허.
 
어떤 글을 쓸 수 있을까. 나는 어떤 글을 쓰고 싶은걸까. 솔직하고 꾸미지 않는 글이 좋지만, 자기 위로나 자아 비대의 글이 아니려면 뭘 쓸 수 있을까.
 
암튼 그 땐 맥주 한 잔 하면 집중력이 뽝, 오히려 더 명확하게 읽고 썼는데, 이젠 쓰려면 술을 줄여야한다는 게 체감상 가장 큰 차이지. 젊었던 그 때가 참 좋았다.
 

@image / After Breakfast, Gambog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