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여름 서울국제여성영화제(SIWFF)에서 보았다.
영화 제목만 들어봤다가, 문득 "요새 사라 폴리는 뭐하지~" 하고 검색했다가 그의 최신작이 이 영화인 것을 알고 헐레벌떡 영화 티켓을 검색하였고 역시나 매진이었다가 틈틈히 재검색을 하여 취소표를 겨우 구했다.
반반차를 쓰고 달려간 극장은 꽤 큰 상영관이었고, 평일 낮이지만 객석이 꽉 차 있었다. 당연하게도(?) 나처럼 혼자 온 여성 관객이 많았는데, 영화를 보는 내내, 그리고 영화가 끝나고 엔딩타이틀이 올라가는동안, 이렇게 많은 여성들과 함께 호흡을 나누며 보고 있다는 것이 - 사실 정식 개봉을 하면 비교적 작은 영화관에서 객석이 듬성듬성 빌 수 밖에 없겠지 - 가 어떤 참혹한 장면들을 견딜 수 있게 하는 안전함과 든든함을 주어 그 자체로 경험이었다. 내년부턴 시우프 꼭 챙겨야지.
아, 올해 시우프의 슬로건은 "우리는 훨씬 끈질기다." 이다.
https://youtu.be/46XQ3ZmROPA?si=Wn_53NjemZg01Pst
※ 결말에 대한 이야기 있음 주의
※ 기억력이 단출하여 이후 각본집을 구하여 한 번 더 읽고 이에 기반하여 기억을 다듬어 쓴다. 각본집에서 혹시 달라진 내용이 있을 수도 있다. (각본집은 여기 👉 https://www.scriptslug.com/script/women-talking-2022)
영화는 다음 자막으로 시작한다.
What Follows is an act of Female Imagination.
여성의 상상. 이 영화의 정체이가 의미이자 지금 이 영화가 나온 이유겠지.
여성의 상상력을 근간으로한 작품이 차고 넘쳤던 적은 언제나 없었지만, 우리의 상상이 왜 필요한지, 왜 우리가 상상해야하는지를 보여준다.
상상력으로 이야기를 짓는다는 것은, 현재 우리가 공유하는 실재, "있는 것"의 일부를 전제 삼아 "없는 것"을 만들어내는 것이니까. 상상은 '어느 방향으로 구체적일 것인가', '어떤 부분은 현실적인 것인가'를 통해 '이 상상이 무엇을 위함인지, 무엇을 지향하는지'를 드러낸다. 그리고 상상의 주체가 얼마나 게으른지도 이 지점에서 뽀록이 나기도 하지.
동시대 현재, 전근대 사회와 유사한 생활방식을 이어나가는 한 폐쇄적 종교/지역 공동체에서 마을 남성들 여럿이 마을 여성 대다수에게(4살부터 60살 이상의 노인까지) 가축 마취제를 이용한 성범죄를 저지른다. 폭력이 지속적으로 수차례 발생하는 동안 마을의 남성 리더들은 이를 묵인하고 꿈이거나 착각, 신이 내린 벌이라고 말한다. 진실을 알게 된 여성들은, 몇 잡힌 남성의 보석금을 내러 마을 남자들이 모두 떠난 날 헛간에 모여 '아무것도 하지 않을지(Do nothing)', '남아 싸울지(Stay and fight)', '떠날지(Leave)' 생애 첫 투표를 한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일찍이 기각되고, 남아 싸울지, 떠날지에 대하여 여성들의 말들, 이야기 함, 이야기 나눔을 영화를 담는다.
볼리비아에서 일어난 "실제 사건을 기반으로 했다"는 자막이 아니라 "여성의 상상의 산물"이라고 표방하며 시작한 것처럼, 영화는 실화의 배경인 볼리비아나 영화의 배경인 2010년대 미국으로 시점이나 공간을 좁히지 않더라도, 광범위한 지역의 꽤 넓은 역사적 시점 어디에서도 들을만한 "대화"를 구성하여 보여준다. 누구나, 언제든, 발견하고 볼 수 있도록.
- I think you should make lists of the pros and cons for both options.
Staying and Fighting or Leaving. And write large. Post it on the wall.
// - Why? We can't read it.
// - No. But we will keep it here as an artifact for others to discover.
영화의 모든 것이 너무 좋았는데, 그걸 감히 내가 어떻게 조목조목 쓸까. 좋다는 이야기를 하려면 그냥 각본집을 통으로 필사하여 보여주게 될 것이다.
All I know is that we cannot do nothing.
"Leaving" and "fleeing" are different words.
Is forgiveness that is forced upon us true forgiveness?
We cannot become murderers. And we cannot endure any more violence. That is why we must leave.
We cannot forgive because we are forced to. But if there is distance, perhaps I can begin to understand how these crimes may have occured. And maybe from that distance, I can pity these men, and perhaps forgive them. And even love them.
Not fighting. But moving on. Always moving. Just moving.
글쎄, 이 즈음 영화 <바비>를 봤다. 거칠게, 반농담을 섞어 말하자면 이 시대 여성주의를 중심으로 한 운동, 저항, 연대, 고민에 대하여 차곡차곡 정리한 초중등 교과서가 <바비>라면, 보다 성인용으로 학부 교양수업 리딩 과제로 나온게 <위민토킹>일까.
정말 차근차근 말해준다. 왜 지금 우리가 아무것도 하지 않을 수 없는지, 그럼 무엇을 어떻게 할 것 인지, 왜 그 방법이 가장 나은지, 무엇을 고려해야할지, 이걸 하는 이유는 궁극적으로 무엇인지. 그 모든 과정에서 버려서는 안 될 것이 무엇인지.
개인이 모여 거대한 무언가를 바꾸고자 하는 것, 너무 길고 지난한 것, 한 번에 바뀌는 것은 없어 늘 좌절하되 또 한 걸음씩을 이따금 어렴풋하게 느끼게되어 동력삼을만한 희망과 낙관 한 톨을 쥐는 것, 너무 다르고 잘 안 맞기까지한 사람들과 추상적인 것을 구체적으로 만드는 것, 그 안에서 지치거나 꼬이지 않고 날서지 않고 내 동력 기관을 잘 닦는 것. 운동에 대한 길고 촘촘한 은유와 직유들은 언제나 귀한 것이다.
싸우는 법을 모르고, 싸우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는 이에게 오나는 무엇을 위해 싸우는지부터 놓치지 않고 이야기하자고 한다.
Before we list the pros an cons of staying and fighting, to talk about exactly what we are fighting for?
(It's obvious. We're fighting for our safety and for our freedomg from attacks!)
Yes. But what would that mean to us? Perhaps we neea a statment which describes what we want the colony to be like after winning the fight. Perhaps we need to know more about what we are fighting to achieve, not only what we are fighting to destroy.
그리고 오나는 평등하고, 더하여 자신을, 공동체 스스로의 위치성을 객관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역량과 그 역량을 길러내는 사회에 대한 이상향을 길게 이야기한다. 이상주의자로, 뜬구름 잡는 사람으로 역시나 한 번 더 핀잔은 얻는 오나지만, "만약 남성들이 이를 거절할 것이면 어떡할 거냐"라는 질문에 그 누구보다도 단호하게, 남아서 싸워야한다고 했던 사람들보다 단호가게 "그럼 그들을 죽여야한다"라고 말하는 뒤이은 그 장면이 더 좋았다.
(What will happen if the men refuse to meet our demands?)
We will kill them.
각본 외에 나는 이 영화의 거의 모든 요소가 다 너무 좋았는데, 우선 배우들. 당연히 너무 대단한 배우들 아닌가. 동그랗고 맑은 눈으로 가장 단호한 이야기를 하는 오나 역의 루니 마라는 물론, 사실 너무 내 취향인 외모의 클레어 포이와 제시 버클리를 그냥 한 영화에서 볼 수 있다는 것 자체가 그냥 즐거웠다. 그녀들의 고집스럽게 다문 입과 그 하관이 너무 좋다.
그리고 미술과 조명이 좋았다.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은 어렸을 때 보고 자란 서구의 명화들과 같은 구도와 질감, 감성이 가득한 영화로 많은 사랑을 받았고, 나 역시 그런 이유로 그 영화를 좋아했는데 그런 느낌을 이 영화에서 다시 한 번 받았다.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 공동체의 헛간에서, 해가 저물고, 밤이 으슥하고, 다시 동이 터오기까지 하루 남짓의 짧은 시간 속에 촉박한 대화가 오가는 동안, 빛이 절제된 어둑한 농가에서 자연적인 빛의 움직임에 따라 드리우는 얼굴의 그늘과 바뀌는 풍경의 색채가 정말 한 폭의 그림 같았다. 다같이 손을 잡고 기도하거나 노래를 하는 어떤 장면들은 꼭 본 적 있는 명화 같아, 영화관에서 보면서도 장면 캡처를 하고 싶은 마음이라 대신 눈을 천천히 껌뻑였다.
최근 여성주의적 시선에서 기존의 고전 문학을 비판하며 새로운 여성 문학과 고전을 세우려는 흐름에서, 나는 이 영화가 하나의 새로운 고전이라고 생각하는데, 문학/각본에서 그러함은 물론, 명화가 될만한 새로운 그림들도 몇 뽑아내었다고 생각한다.
휠뒤르 그뷔드나도티르의 음악도 좋았다.
또 좋았던 것은 마치 신이 하늘에서 내려다보는 듯한 시선의 촬영과 연출이다.
아침에 일어나 다리 사이에서 영문도 모를 피와 멍을 발견하는 여성들을 보고 있다. 신이 내려다보는 것은 가해자 남성이 아니라 이 여성들이다. 특별히 따뜻하거나 온정적이지는 않지만, 다 보고 있다.
현대 사회에서 '종교'를 이유로 노동집약적이고 폐쇄적인 공동체를 이루어 사는 것이, 그러한 유별난 모습으로 사는 것에 대해 누군가는 미개하다고 말하고, 또 어쩌면 그러니 그런 범죄가 일어나기 쉬운 배경이라 문제삼을 수 있겠으나, 이 모든 대화에서 남자들을 단번에 죽여버리는 선택을 끝끝내 하지 않는 것, 더 나은 선택을 하고 하는 동력과 기준도, 새로운 떠남을 결심하게 하는 것도 모두 신에 대한 믿음과 종교이다.
나는 이 영화 내내, 어쩌면 싸우면서 성취해야할 것, 결코 파괴하거나 잃어서는 안될 것, 사적인 복수가 아니라 공동의 변화로 꿰어내고자 노력해야하는 것에 대해 한결 바른 언어를 가지고자하는 근본적인 무언가가 "있는" 대화의 힘을 무척이나 생경한 기분으로 느꼈고, 또 감격했는데, 특정 종파 등을 떠나서 "사람이 그러해서는 안된다"는 전제, 폭력에 대한 거부, 누구든지 언젠가는 섭리에 따라 결과와 책임을 지게 될 것이라는 믿음, 신이 우리를 버리지 않았을 것이며 그렇기에 더 나은 삶과 사회를 위한 의무와 같은, 그리고 그 더 나음의 기준을 좀 더 통시적이고 보편적인 관점, 나나 개별적인 개인의 바깥에 세우는 방식이 가능하게 하는 것으로 '종교'란 것의 역할을 생각하게 되었던 것 같다.
나는 종교가 없다. 그러나 어떤 '믿음'의 순기능에 대해서는 긍정할 수 밖에 없다. 17세기 혁명으로 세운 '천부인권'이라든가, 20세기 전후에 합의한 '평화'라는 것들의 가치의 유효기간이 마치 다해가는 듯한 현대, 그럼 이제 우리가 근간으로 삼을 기본적인 공리들은 무엇을 바탕으로 세울 수 있을까. 새로운 공리를 세우지 못하고 실천하는 평등이나 전복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당연한 듯 배제/누락할 것이며, 얼마나 많은 잔인함을 두둔할 것인가.
The Lord is gracious and compassionate, slow to anger, rich in loving kindness and forgiveness. (시편 145 8-9절)
사실 위 기도문을 찾고 싶어서 각본집을 읽었다. 성경을 제대로 읽어본 적이 없어서 어떤 맥락인지 모르겠다. 그러나 "노하기를 더디하시며"라는 저 기도문을 배경으로 펼쳐졌던 산등성이의 풍경을 잊지 못한다. 더디지만 노하실 것.
한편 <바비>가 아동용이고 <위민토킹>이 성인용이라는 우스갯소리를 했는데, 어쩌면 내 의식이 남성 기준으로 아동남성용, 성인남성용으로 구분한 것일지도ㅎㅎ <바비>에서는 우는 켄을 마지막에 달래주지만, <위민토킹>에서는 호락호락하지 않다. 떠날 때 그럼 어린 아들들은 남기고 떠날 것인가, 데려가도 될 것인가를 논의하고, 이 모든 대화를 묵묵히 참관하고 기록하도록 허락받은 유일한 남성이자 그리고 동시대 남성에 대한 나름의 비판적 의견을 낼 수 있는 유일한 남성, 그리고 마을의 선생님인 그에게 단호하게 남으라고 이야기한다. 그에게 죽는 것도 허락하지 않는다. 아이들의 선생님으로서 중요한 임무를, 책임을 다하라고 한다.
Don't kill yourself August. You have important work to do. You are the boys teacher.
(어제 드라마 <연인>을 봤는데 마지막화에서 "나도 능군리에 가도 될까." 묻는 연준을 품어주는 장면을 보며, 이 장면이 다시 떠올라 잠깐 웃었다. <바비>처럼 다정하게 다시 품어주는 것도 못 견디는 멍청이들도 너무 많지.)
사라폴리가 줄곧 여성 창작자로서 해온 상상력이 어디까지 왔는가, 얼마만큼 벼려졌는지 느꼈고, 줄곧 이 사람을 좋아해왔던게 뿌듯하고 자랑스러웠다.
<우리도 사랑일까>에서, <우리가 들려줄 이야기>로, <그레이스>로 점차 시대를 넓히고, 추상적과 보편성을 넓혀 여기까지 왔다. 옛날 위대한 남성들만 사유하던 것들, 아니 그들이 사유해야만 쳐주던 것들을 여성만이 할 수 있는 방식으로, 그러나 여성만의 이야기로 과소평가 당할 수 없는 드넓음으로 고전들을 불태운 자리에 새롭게 설만한 것을 가져오다니.
그러니 제발 정식 수입, 배급이 이루어지길. 아니 안하고 무엇하는지.
다시 보고 싶고, 그 땐 종이와 펜을 챙겨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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