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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따금 일기/읽은 문장들

[문장들] 나는 지금도 거기 있어 (임솔아, 2023)

by momorae 2024. 2. 12.

 

세세하게 배려받는 것 같지만 치밀하게 소외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온도 때문이라기보다는 온도의 차이 때문에 사람들은 감기에 걸린다.

 

새로 구한 집은 원룸이었지만, 사용 공간은 훨씬 넓었다. 석현의 쓰레기들이 없어서였다. 석현의 작품들이 없어서였다. 화영은 그게 좋았다. 좋다고 느껴지는 게 좋지는 않았다.

 

무엇인가를 포기했기 때문에 석현과 헤어지게 된 것일까. 무엇인가를 포기하지 않았기 떄문에 석현과 헤어지게 된 것일까.

 

언제든 포기해도 상관없다. 이렇게까지 해야 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이제는 헤어지기 위한 노력을 하지 않아도 되었다. 이미 헤어졌으니까. 이별은 우주와 선미가 함께 만들어낸 축복이었다. 실패가 아닌 결실이었다 기어이 같이, 해냈다. 우주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무엇인가를 바꿀 수 있다고 믿는 천진난만한 사람들. 꿈을 꾸는 사람 특유의 설렘과 순진함이 느껴졌다. 그런 순진함이 보라에겐 뭘 모르는 어린아이의 것 같았으나, 한편으로는 자신이 틀렸기를 바랐다. 순진함은 곁에 누군가가 있어서 따뜻하다고 느껴질 떄에 잠시 잠깐 배어나오는 홍조 같은 것이므로, 보라도 순진한 채로 그 시간을 보내고 싶어졌다.

 

상상이 사라진 자리에는 모범생으로서의 자부심이 차올랐다.

 

누군가를 이해하려고 애쓴 흔적이 작품에서 읽히기를 정수는 바랐지만, 작품은 독창성을 기준으로 이야기되었다.

 

들었던 이야기를 재현하는 것을 선택하지 않고, 스스로 경험한 이야기가 아니기 때문에 끝끝내 알 수 없는 부분을 가지고 작업을 했다.

 

과거의 어느 한 지점에 멈춰 선 채로 살아가는 사람이 있었고, 도착하지 않는 미래에서만 살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

 

 

어떤 염증에선 김혜진 작가의 <너라는 생활>이 생각났고, 성인이 되어 우연히 만난 4명이라는 조합에선 김화진 작가의 <공룡의 이동속도>가 생각났다. 서로 다른 소설이고 각자 좋은 소설이지만 이 네 명의 만남이 더 필요할 것 같다, 라는 생각도 잠시 했다. 어떤 식으로든 타고난 책임감이 강한 사람들이 있다. 그럼 다른 사람들은 무책임하냐, 그런 건 또 아니고.

 

특히 우주와 보라의 이야기가 마음에 남는다. 화영의 파리의 스튜디오의 흰 벽과 창틀, 활동가들을 만나는 정수 모습도 환하게 기억이 난다.

 

거기 있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이젠 알지. 그렇다고 여전히 거기 있는 사람들을 미련하다, 어리석다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나서서 때려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