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작은마음동호회
나이를 먹듯 꾸준히 가난해지는 자기 언어의 잔고를 매일 지켜보는 회계사이고, 자신의 정직과 허세 양쪽으로부터 소장을 받고 힐난을 당하는 피고소인이다.
승혜와 미오
승혜는 스스로 남들의 시선이 조금도 섞이지 않은, 온전히 자기 자신만의 시선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아직 되지 못했음을 알고 있었다. 그 점이 미오와 승혜의 다른 점이었다. 하지만 승혜는 그런 사람이었고, 있을 수 있다거나 있어야 한다는 문제를 떠나 이미 그냥 그렇게 세상에 '있었다'
마흔셋
어디에도 머무르거나 닻을 내리지 않고 살고 싶다고 생각한 건 아마 그 짧고 미친, 경제적으로는 아니더라도 문화적으로는 톡톡히 혜택받은 이십대 초반의 한 조각이 너무도 달콤해서였던 것 같다.
엄마를 방치하고 있다는 죄책감을 매일 밤 베게 밑에 깔고 잠을 자면서도, 나는 가능한 한 엄마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으려고 했다.
사람에게 혼을 다해 몰두해본 적은 없었다. 내 삶의 즐거움은 대체로 일과 공부와 취미에서 비롯되었다. 그런데 마흔 살이 넘어가자 그 부분이 돌아가는 느낌도 매끄럽지 않아졌다. 젊은 저자일 때 머리 위에 걸려 있던 매력과 호감도 상승 버프가 사라지면서 나를 너그럽게 봐주던 모든 사람들이 말없이, 일제히, 은퇴해버린 것 같은 기분이 들기 시작했다. 처음으로, 정말로 세상 가장자리로 밀려난 느낌이 들었다.
이렇게 늦게 어지러움을 느껴도 되는 것일까. 이렇게 일찍 낡아버려도 괜찮은 것일까.
이웃의 선한 사람
나의 부모, 그리고 장인 장모가 숱하게 말해온 것처럼 그런 게 삶이었다. 제법 큰일임이 분명한 그런 일이 벌어졌는데도 감쪽같이 오므라들고 틈새가 붙어 예전처럼 또 굴러갔다.
믿고 싶지 않지만 보이는 일들과, 일어났지만 자신의 것처럼 느껴지는 않는 일들 사이에 여전히 전진도 후진도 할 수 없는 상태로 끼어 있을까?
님프들
나는 그들의 긴 대화를, 그 소설에 그려진 그들의 마지막을, 책장 바깥까지 똑바로 연결되며 펼쳐지는 듯한 삶이라는 것의 진부함을, 마치 준과 나의 미래에 대한 예언처럼 보이던 그 찝찝한 패배와 타협의 느낌을, 우리 역시 언젠가 그렇게 똑같아지고 말리라는 기시감을, 참을 수 없었다. 지금 생각하면 민망한 치기지만 그때 우리는 겨우 이십대 초반이었다.
그때 무언가를 했더라면, 혹은 하지 않았더라면, 그런 말들로 우리 스스로를 괴롭히지 않기로 해. 가정법은 감옥이야. 그걸로는 어디에도 닿을 수가 없어. 나는 현재를 살거야.
과거의 형벌을, 잘못 내린 선택의 총합을 살지 않을 거야.
그러나 그럴수록, 그가 나와 번갈아 아이를 보고 집안일을 하는 동안 책임감과 행복함을 느끼기는커녕 실은 영혼을 마모시키는 온갖 사소하고 잡스러운 노동에 질려 알게 모르게 저 비명을 소리 없이, 수도 없이 질러왔던 게 아닌가 싶었다. 그가 우리의 결혼을 짐으로 느끼고 있다는 생각이, 이 생활이 그에게 소중한 무언가를 지속적으로 죽이고 있으며 그것에 대해 어떻게 하기에는 이미 너무 늦어버렸다는 생각이, 그것이 나의 잘못은 아니지만 나의 잘못이 아닌 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집요하게 고개를 쳐들었다.
그랬다가는 입이 딱 벌어질만큼 무겁고 슬프며 지나치게 솔직한 이야기들이 줄줄 딸려나올 것 같았으니까.
2023년 10월 읽고, 11월 옮김 /
<님프들>은 연거푸 세 번을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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