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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낭에서 꺼낸 이야기/2023_가을_일본_북큐슈

[2023 가을 일본 북큐슈 여행] Day 04_후쿠오카 ②저녁술

by momorae 2023. 10. 26.

저녁은 반려인이 찾아놓은 아주 작은 사케바. 약간 충정아파트st의 너무 낡은 건물의 2층이어서 이거 위생적으로 괜찮은 바가 맞을까 걱정하며 이층을 올랐는데, 왠걸 좁지만 화장실까지 너무 깨끗한(중요&감동) 작은 가게였다. 그런데 안주가 적절하지 않고 사실 술을 "고르기"에 어려운 가게였다. 물론 일본어를 못하지만 파파고로 사장님께 여쭤보거나, 또는 사케의 도수, 도정수준, 매운맛 표기가 있다면 적당히 골라보았을텐데 그럴 수 없어 조금 슬펐다. 나름 고른 잔술은 맛있었는데, 이게 이번 우리 여행의 마지막 술집이다? - 라고 하기엔 왠지 석연치 않은 마음. 왜냐면 마지막 술집이니 제법 취해서 한들한들 걸어가기에 부담없으려고 숙소에서 가까운 곳으로 고른 것이란 말이다! 그런데! 그런데! 뭔가 아쉬워! (가게는 좋았다, 다만 아쉬웠다...! 제가 사케 공부를 더 하고 올게요😭)

SAKESOUTH

 

그래서 구글링을 하여 조금(?) 먼 가게를 한 곳 더 골라 계획에 없는 2차를 갔다.


가는 길엔 나카스 강변 지역을 거쳐갔는데, 사실 나는 19년 후쿠오카를 왔을 때 이 쪽은 온 적이 없었고, 후쿠오카에 이런 환락가가 있는지 몰랐다. 검색해보니 무슨 3대 환락가라는데... 저 멀리 야타이 거리엔 정말 사람들이 바글바글해보이고, 작은 광장에선 무슨 페스티벌을 하는지 무대공연과 푸드트럭으로 흥성거리고, 한 골목 꺾어진 곳은 각종 클럽과 러브모텔과 취한 사람, 화려하게 입고 벗은 남녀들이 서로 엉켜 걸어가고 있어서 조금 쭈글했다. 아 - 말그래도 일본에서 보기 힘든 덩치의 가드가 서있는 건물도 지남... 그리고 목적지인 가게 바로 옆 가게도 문틈으로 엄청난 조명과 남녀가 시끄럽게 서로 술을 먹이고 있어... 우리 가는 곳 가도 되는 가게일까 매우 걱정스러웠...

 

지만 문을 여니 정말 너무 새하얗고 단정한 공간이 나타났다. 조용하고 차분하고 귀엽게 생기신 젊은 여성 사장님이 맞아주셨는데, 우리 동네 자주 가는 와인바틀샵 사장님과 묘하게 닮은 동그란 얼굴이라 순식간에 마음이 녹아 아주 친숙한 가게인 것처럼 앉았다.

'쿠모레비'에서 사장님 다음으로 귀여운 존재


日本酒バー 雲レ日 니혼슈바 쿠모레비

 

아 진짜 너무 좋았다.

(그런데 취해서 신나게, 맛있게 마시느라 사진이 별로 없다😥)

 

메뉴판엔 직접 그린 사케 병과 라벨 그림들이 있었고, 너무 특징을 잡아 잘 그리셔서 이 그림만 보아도 사장님 뒷 편 냉장고에 있는 많은 술병들 중 어떤 것인지 바로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지역, 정미비율, 맛 척도들이 정리되어있었다.

메뉴판 사진 하나 잘 찍어둘걸😭

 

그리고 리스트 중 3개를 고르면 작은 접시에 나란히 담아주는 500엔 나만의 안주접시를 만들 수 있었는데, 정말 너무너무 좋은 시스템아닙니까. 이 곳은 술꾼들에게 너무 좋은 곳이다... 그리고 심지어 맛있어... 우리는 유바(?)와 명란, 김을 선택했는데 정말 하나하나 너무 맛있는 음식이었다. 술안주인만큼 간간하지만, 그렇다고 과하게 짜지 않고 그 재료 좋다는 느낌의 맛. 유바랑 명란 김 각각 포장해서 판다면 사오고 싶었고, 아니 이 술집을 저희 집 옆으로 옮겨 오고 싶은데요, 어떻게 경기도 남부 2호점 내실 생각 없으신지.

미친 술안주 플레이트, 이게 5천원이라구요?

 

아 그리고 정확히 기억은 안나는데, 메뉴판 맨 뒷장에는 "laboratory" 같은 이름의(정확히 기억이 안난다) 코너가 있었다. 매일인지 매주인지 바뀌는 사장님이 직접 큐레이션한 비교 샘플러(라기엔 그냥 2잔이다). 와 이런 코너가 있다니 여긴 정말 찐이다. 사장님 당신이 정말 맛있는 사케를 재미있게 꼭 먹여보고 싶다는 의지가 있다는 걸 생생하게 보여주는 코너.

그래서 시켜보았다, 같은 양조장 다른 스타일


그래서 저희가 이 날 여기서 몇 잔을 마셨냐면요... 대충 인당 5잔씩...?! 6잔인가...?!

 

사실 사케는 아직 잘 모른다. 한국에서 지금까지 마셔본 사케 중 정말 맛있다 - 라고 생각하는 3개가 있는데, 그 중 하나랑 같은 양조장의 술이 이 가게에 있었고 너무나 반가운 마음으로 마셔볼 수 있었던 게 너무 큰 기쁨이었다. 사실 이 카모니시키라는 양조장의 술은 대표님과의 술자리에서 처음 마셔봤었는데 먹는 순간 '와 이건 사케 중에 내 스타일의 표본이다' 싶어 대표님 앞으로 팔을 뻗어 라벨을 찍어두었었고, 이곳의 다른 술들도 먹어보고 싶다고 줄곧 생각했었다. 독특한 라벨 때문에 바로 알아볼 수 있었고, 이 양조장의 술이 있다는 것에 사장님의 취향에 냅다 100% 신뢰를 보내며 다음 술을 추천받을 수 있었다는 모든 것이 너무 즐거웠다. 후쿠오카의 이 밤을 즐거이 보내게 해줬다는 점에서 그날 회식의 의의를 둡니다.

(좌) 작년 회식 때 마신 술 (우) 이번에 마신 것

계속해서 마시다보니 사장님도 우리가 작정하고 온 인간들인 걸 알았던걸까. "이 다음 술로 뭘 먹어보면 좋을까요?" "저희 정말 마지막 잔인데, 마지막으론 무얼 마셔봐야할까요?"에 정말이지 진심으로 고민하여 골라주시거나 또는 "그렇다면 이거!" 하고 바로 내어주시는 게 한국에서 참 감사한 많은 단골 술집들 사장님들과 겹쳐보여 점점 몸을 앞으로 기울여 계속 헤헤 웃었던 것 같다.

저희가 여길 다음 주말에 또 올 수가 없어서...

정말 다른 분위기지만 역시나 '너희가 마실 마지막잔, 너희에게 꼭 맛보여주고 싶은 마지막 술은 이거!' 라는 표정이 둘째날 구마모토 소츄바 사장님과 닮아 "아 우리가 (단골)술집 사장님 복은 있나보다" 하며 진짜 한껏 즐겼다. 감사했다.

오래된 사이드프로젝트 (오직) 구상으로 술집/바틀샵/브루어리/유통사 등에서 일하는 여성분들을, 그러니까 진짜 맛있는 술을 더 많은 사람들에게 기필코 맛보여주고 싶다는 욕심이 있는 여성들을 인터뷰하여 콘텐츠를 만들고 싶었는데, 그 오래묵은 열정이 조용히 불붙어 들뜨는 밤이었다.

나무로봇친구 다음으로 귀여운 식기와 아름다운 글라스

 

입구까지 나와 인사해주시는 사장님께 함께 고개 숙여 인사하고 조금 걸어나와 뒤를 돌아보니, 단골이신지 어떤 여자 손님과 손을 맞잡고 반갑게 인사하는 사장님과 손님분의 표정이 너무 좋아 끝까지 기분이 좋았다. 좋겠다, 단골하실 수 있어서...

 

가지 못하지만 새로 들어온 바틍을 꾸준히 업로드하는 인스타 계정도 팔로우했다. 그리고 이렇게 맥주 소식을 업데이트 하고 있거나 했던, 사라진, 서울의 공간들이 떠올라 한순간 쓸쓸한 바람이 불었다.


갈 때는 무서웠던 거리를 적당히 들뜬 취객으로 반려인 손 꼭 붙잡고 걸어나와 편의점에 들려 컵라면을 샀고, 호텔로 돌아가 해장까지 야무지게 하고 푹 잤다. 여행 마지막 밤이었다.

 

 

😹

사장님 정말 많이 버시고 잘 됐으면 좋겠는데, 이렇게 올려서 너무 유명해지면 어떡하지 (이 블로그 방문자수를 고려할 때 그럴 리 없음). 감사했습니다, 또 갈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