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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따금 일기/듣고 본 것

[연극] 새빨간 스피도

by momorae 2023. 8. 27.

설마 벌써 2년 전인가. <레드 스피도>의 낭독극을 보러갔었다. 비지정석의 좁고 컴컴한 극장에서 낭독극이라는 처음 경험하는 형식의 무대극을 보고 '텍스트에 깊게 귀 기울이는 집중의 방식이 마음에 든다' 정도의 감상만 남기고 잠시 잊었다. 그런데 문득문득 분명 있었을리가 없던 수영장의 물결을 마치 당시 낭독극 무대 오른편에서 본 것처럼 기억이 되살아나곤하여 함께 봤던 남편과 함께 '이상하다'하고 있었다. 그러다 드디어 정식 연극 <새빨간 스피도>가 세워진다고하여 바로 예매하였다.

오쏘파스타 / 시칠리아 라구파스타와 고구마바질페스토 스파게티

수영을 하는 행위는 수평적이다. 수면은 수평이고, 엎드려 배를 수영장 바닥과 수평하게 두고 앞으로 나아간다. 그러나 객석에서 무대를 바라보는 것은 수직적이다. 우리는 배우를 비롯하여 무대의 세워져있는 것들을 바라본다. 이런 절대적인 방향성에서 수영을 어떻게 표현하였을까, 어떻게 보여줄 수 있을까. 경지은 배우의 몸짓으로 나는 마치 물속, 수영장 바닥에 누워 수면 위로 지나가는 선수의 배를 올려다보는 것처럼 물결 가름을 느낄 수 있었다.
한편 "역시 극에 비해 무대가 좀 큰가?"라고 잠시 생각했었으나 극의 후반에서 무대 뒷부분이 열리면서 마치 거대한 수영장의 한 구석에 서있는 것과 같은 - BBC 셜록에서 모리아티와 직면하는 그 수영장보다 더 큰 - 공간감을 느낄 수 있었고, 마치 여느 타일 공간이 그러하듯 소리가 울리는 것 같은 착각마저 들렸다. 이 공간을 구현하기에 적정했다면 이 극장을 선택할 수 밖에, 하고 고개가 끄덕여졌다.
 
수영장이라는 무대 공간만큼 좋았던 것은 여성의 몸에 대한 경험. 경지은 배우는 '레이'라는 남자 수영선수 역을 분하는데, 그간 젠더프리 캐스팅 극을 여러번 봤으나, 운동 그리고 수영이라는 소재를 가진 극에서 여성 배우의 신체로 구현되는 남성의 몸이란 걸 정말이지 특히 더 짜릿했다. 수영복 하나만을 걸치고 무대 위로 걸어나와 다양한 준비 운동부터 수영처럼 손을 뻗고 다리는 뻗고 벌리는 여러 자세를 취하는 여성의 신체, 분명히 여성의 신체이나 그걸 여성의 몸으로 볼 겨를을 전혀 주지 않는 어떤 구현. 나 역시 비록 여성이고 여성의 몸에 대한 성적 대상화를 비판할 줄 알지만, 정말이지 이러한 자유로운 시선, 철저하게 해방된 시선을 가져본 것도 처음인 것 같다. 오히려 <사이렌>은 여성의 신체이고 여성의 몸으로서 하는 수행이기에 더 감탄했고, 칭찬이고 동경일지언정 대상화는 대상화인 - 여성의 몸을 이렇게 먹을 수 있는 게 있다니에 가까운 - 즐거움이었던 것 같은데, 이번 <새빨간 스피도>는 정말 생물학적 성이나 성별 이분법의 해석이 자리잡을 여지가 없어 바라보는 주체인 나에게도 그 자체로 난데없는 해방감이었고 생경한 '봄'이었다. 이런 자유로운 '바라봄'을 수행할 수 있는 텍스트가 더 많아지면 얼마나 좋을까.
 
수영 레일을 이용한 연출도, 그리고 피터역의 박종현 배우도 좋았다 - 덧붙여 써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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