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6.26 기록
일민미술관 전시 <히스테리아 : 동시대 리얼리즘 회화>를 보고
김연수 작가의 신작 <이토록 평범한 미래>는 그 일부에 대한 김승옥 문학상 심사평이 말했듯 “김연수의 서명과도 같은 주제인 ‘타인을 이해한다는 것’에 대한 성찰이 지금 어디까지 와 있는지”로 꽉 채워진 단편집이었다.
나는 잠시 외면했던 아저씨의 이토록 성실하고 부단한 고민이, 한결같은 치열함과 집요함이 새삼 고마웠다. 어쩌면 내가 냉소적인 태도로 그러한 천착을 비웃었던 지난 몇 년, ‘타인을 이해한다는 것’에 대해 고민하는 사람은 참 많이 줄었는데(어쩌면 나도 그에 기여하였는데), 지금까지도 이런 고민을 하는 사람이 있다니, 그것이 주는 감동과 표하게 되는 경의가 있었다.
타인을 이해한다는 것은, 결국 타인의 경험을 내 속에 어떻게 재현해낼 것인가, 타인과 어떻게 관계 맺어야하는가에 대한 물음일 것이다.
지난 금요일 일민미술관의 <히스테리아 : 동시대 리얼리즘 회화> 전을 보고 왔다.
더이상 재현과 해석에 대해 어떤 논지를 전개할 자원도, 언어도, 정교함도 나에겐 남아있지 않지만, 처음으로 학예팀과 기획자의 이름을 메모할 정도로 전시장의 모든 텍스트가 좋았고, 그만큼 나도 무언가를 감히 적고 싶어졌다.
“회화는 필연적으로 재현의 문제를 수반한다”로 시작하는 이 전시는, “현대 미술이 재현보다 재현의 부정이나 불능에 더 관심을 가지게 된 이후”로서 동시대를 설명한다. 나에게 이 전시는 “더 이상 재현을 문제 삼지 않는 사회 혹은 시대” 에 대한 것이었고, “그런 시대에 ‘윤리’란 어디로 갈 것인가”에 대한 물음을 내포한 것이었다.
여러 작가 소개의 글 중 함성주 작가에 대한 글과 김혜원 작가에 대한 글은 “왜 동시대가 재현을 문제삼지 않는지”에 대한 단서 같았다. 오늘날 대상에 가닿기까지 나와 대상 사이에는 너무 많은 액정이 있다. 액정을 통해서만 보이는 이미지는 물론, 액정에 닿은 접촉면 역시 하나의 이미지가 되어 대상까지 거리가 가깝든 멀든 층위가 겹겹이다(함성주). 또는 동시대의 ‘사진 찍기의 손쉬움’과 맞닿아 어떤 류의 절약이나 망설임, 전략은 더이상 필요 없어졌다(김혜원). 김혜원 작가에 대한 텍스트 중 “보는 일을 통해 대상과 특정한 관계를 맺는 대신 충동을 충족하는” 것에 대한 내용은 어쩌한 더이상 재현에 대해 논하지 않는 것, 타인을 이해하는 것에 대해 질문하지 않는 것을 정확히 묘사하는 것 같았다. 무엇을 볼 것인지, 어떻게 볼 것인지 생각할 필요없이, 불현듯 그냥 ‘내가’ 보고 싶을 때 보고 찍는다.
재현이 가능한가, 불가능한가 - 에 대한 논의가 아니라 재현이라는 개념을 상실한 사회. 굳이 논하지 않는 사회. 논하는 것을 잊은 사회.
바라봄은, 재현은 곧 “관계 맺기”이고 상호작용인 점을 - 외면하거나 부정하는 사회. 나의 어떤 행위가 필연적으로 어떤 것을 대상화하며(할 수 밖에 없으며 - 시선이라는 것은 그러하니까.) 그것은 대상에 영향을 주고(줄 수 있고), 그렇기에 대상과 내 행위에 - 그것이 단순히 ‘바라보는 것’일지언정 - 대한 윤리적 고민이 필요하다는 것 자체를 부정, 아니 상상, 아니 인정하지 않는 사회.
나의 애인은 언젠가 요즘 사람들이 자신을 제외한 모두를 게임 속 npc 로 간주하는 것 같다고 표현하였는데 그것이 바로 이런 것일까.
“리얼리티에 대한 책임”은 “말을 걸어오는 바에 대한 응답”이라면, 더이상 응답할 생각조차 하지 않는 무책임한 상태. 말을 걸어오는 것이라고 인식하지 못하는 상태. 나만 말을 거는 상태, 아니 그냥 찍는 것이지 말을 건네는 것이라고 자각하지 못하는 상태. 윤리 없음.
한편 노충현 작가가 “보편성에 기대어 시각적 진실을 획득한다거나” “묘사하지 않는 그리기”를 지향한다는 것, 손현선 작가가 “반복해그리며 대상이 명료해지길, 현실성을 획득하길” 믿고, 의지를 불태운다는 것은 어쩌면 정말 꿋꿋하게 다시금 재현의 윤리, “타인을 이해하는 것”, “진실에 가까이 가는 것”, 혹 그것이 불가능하더라도 “계속 해야하는” 노력에 대한 각자의 대답이었다.
손현선 작가에 대한 텍스트에는 ‘화가가 되는 것(김장언, 2022)’의 문장이 다음과 같이 인용되어있다. “움직임을 그리고 싶다는 것은 단순히 표현의 문제에 머물지 않는다. 그것은 시간의 문제를 회화로 다루겠다는 의지”다.
전시장 하얀 벽의 “무언가를 문제 삼겠다는 의지”라는 단어가 자꾸만 눈에 밟혔다. 나는 더이상 김연수 작가에 대해 냉소적인 태도를 보이지 않을 것이며, “문제 삼는 의지”에 비웃음을 일관했던 스스로가 부끄럽다.
너무 근대적 질문일까? 한편 이제 바라보는 주어에 AI 어쩌구가 들어가며, 왜 그것을 그렇게 바라보았는지 바라본 사람에게 이렇다할 설명을 듣기 어려워진다고들도 하는데. 윤리란, 과연 사회적 질문과 논의의 장에 언제까지 존재할 수 있을 것인가. 아무도 거들떠 보지 않는 질문은 어디로 가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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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age / 마포중앙도서관, 김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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