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가을 도쿄에 출장을 갈 일이 있었다. 그보다 딱 한 달 전 호시노겐 MAD HOPE 공연을 보러 요코하마에 가기 전 혼자 한나절 시부야와 산겐자야를 돌아다녔던 게 나의 첫 도쿄. 스무살 이후 대략 아홉번 정도 일본에 갔으면서 정작 도쿄엔 한 번도 가질 않다가 (고치현의 펍에서 만난 현지인들은 이것에 매우 놀랬다) 갑자기 한 달 간격으로 연달아 두 번이나 도쿄에 오게 될 줄이야. 한 달 사이에 도쿄의 공기는 제법 차가워져있었다.
여러모로 사연 많고 속 시끄러웠던 출장이었고, 몸도 마음도 여유를 갖기 꽤 어려운 일정이었다. 그래도 틈틈히 혼자 걸을 일이 있을 땐 10월에 끝난 콘서트의 여운을 즐기며, 아니 그보단 좀 더 절박한 것으로, 겐상 노래로부터 힘을 얻거나 정신을 꽉 붙잡으며 이 출장을 견뎌냈던 것 같다. 돌아와 몇 개월이 지난 지금엔 나쁘거나 힘들었던 것들은 적당히 휘발되었고, '그래도 그건 좋았지' 하며 그 때 가을 도쿄의 맑고 차가운 공기가 담긴 것 같은 선명한 풍경 몇 장면을 떠올리며 슬며시 웃곤 한다. 몇 번의 경험을 떠올려보면, 어쩌면 해외에서 가장 소중한 기억을 만드는 방법은, 해외 출장지에서 아주 찰나의 혼자만의 시간으로 그곳을 누리는게 아닐까 싶기도 하고 (아님). 내내 회사사람들과 지내다가 잠시 혼자가 되었을 때의 홀가분함, 다만 언제든 업무에 복귀해야하는 적절한 긴장감, 그 사이에서 시간 제한을 두고 낯선 곳울 콤팩트하게 즐기기. 아냐, 그래도 가급적 출장은 안 가고 싶다, 하하.
출장인만큼 혼자 도쿄에 여행을 왔다면 굳이 가지 않았을 곳들을 가게 되었다. 그 가운데 내가 가장 좋아했던 곳, 지금에와서 가장 자주 떠올리는 곳, 동시에 내가 이곳을 좋아한다는 사실이 스스로도 꽤나 의아하고 어이없어 실소하게 되는 곳은 바로 도쿄역, 그리고 그 주변 마루노우치. 애초에 도시를 아주 좋아하지도 않고, 그런 번쩍거리는 고층 빌딩숲을 아주 질색하는 주제에 (명동, 여의도, 테헤란로 모두 꽤 싫어해서 갈 일을 최소화하며 살고 있다) 나도 내가 낯설다. 그런데 도쿄역을 볼 때마다 아름답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아 생각이라기보단 마음이 동하는 층위의 것. 너무 웃겼다. 아니 서울역도 있잖아. 내가 아무리 민족주의적 애국심이 꽤 부족한 인간이라고 할지라도 도쿄역을 보고 이런 마음을 품는 건 한국인으로서 좀, '국사'를 배운 사람으로서 좀 그렇지 않나 싶었네 (전생에 매국노였나). 또, 이 오래된 도시에 이만큼의 휘황찬란한 토지개발 과정이라면 분명 없지 않았을 폭력에 대해 어쩔 수 없이 어렴풋 상상하면서도. 그러나 동하는 마음을 어찌할 순 없고. 도쿄역 광장과 그 주변 내가 갈 길을 한 치의 의심없이 정확하게 아는 것과 같은 발걸음으로 분주하게 오가는 사람들 사이에서, 저녁 또는 아침의 찬 바람을 맞으며 괜히 걸음을 살짝 늦추었던 것을 두고두고 떠올린다. 좋았다. 다음에 도쿄에 온다면 도쿄역사 내에 있다는 도쿄 스테이션 호텔에 한 번 묵어보고 싶다 생각할 정도로.

딱 한 끼의 식사를 혼자 할 수 있었다. 그 때 샌드위치 하나를 포장해서 황거외원 벤치에서 점심을 먹었다. 달리기를 하는 사람들이 정말 많았는데, 특히 외국인들이 정말 많았다. 공원을 두른 해자 근처의 쭉 뻗는 도로를 걸을 일이 이후에 한 번 더 있었다. 그 때도 달리기 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또 딱 하룻밤, 모든 일정을 마쳤을 때 혼자 나가기에 너무 늦지 않은 시간이었던 날이 있었다. 마침 도쿄에 혼자 여행을 와있다는 친구에게 연락을 해볼까 하다가, 며칠 내내 온종일 사람들과 붙어있다보니 입도 뻥긋하고 싶지 않아 아쉽지만 그냥 혼자 걸었다. 긴자의 드럭스토어 몇 군데를 들려 엄마가 좋다고 했던 파스를 찾았다. 구글맵에서 craft beer를 검색해서 적당히 멀지 않는 곳 하나를 찍어, 부디 이 소중한 하룻밤을 보내기에 꽤 괜찮을 곳이길, 내가 뽑기를 잘 했길 바라며 낯선 교차로들을 건넜다.
원래는 스미다 강을 건너 츠키시마 쪽에 가보고 싶었다. 하지만 긴자 거리를 벗어나자 여전히 촘촘하고 건강한 가로등과 달리 차와 사람이 확연히 적어지고 강에 가까운 방향의 밤이 꽤나 어둡게 느껴져 왠지 겁이 나 그만 두었다.

작은 가게였고, 폐점 한시간 전쯤이었나. 사장님과 나 둘 뿐이었다. 특이하게 스페인에서 만든 크래프트 비어가 탭으로 있었다. 스페인 사우어는 처음인 것 같은데. 걷는 동안 꽤 쌀쌀했나. 첫 잔, 새콤한 첫 한모금을 마시고 몸을 부르르 떨었다. 며칠만에 고요해진 것이 꽤나 포근하게 기억된다. 동행자들이 꽤나 괜찮은 사람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혼자의 시간이 필요했다, 역시. 두번째 잔이자 마지막 잔으로 일본 로컬 사우어나 세종을 추천해달라고 했고, 그렇게 추천받은 것들 중 마지막 한 캔 남은 사이타마 지역 브루어리의 살구 세종을 선택했다. 왜나면 호시노겐 고향이 사이타마여서 ㅋㅋ

혹시 들고가선 며칠 내 손도 못댔던 <인류학자>들도 드디어 펼쳐 조금 읽었다. 나 역시 내내 낯설었던 대도시의 한복판에서, 도시에서 집을 찾아 헤매는 이방인 커플의 이야기를 읽자니 조금 울렁거렸달까.
어디에 살든 변화를 요구받으리라는 사실을 늘 알고 있었다. 우리가 안심할 곳은 어디에도 없었고,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 깊은 잠처럼 편안하게 느껴질 언어도 없었다. 떠도는 삶에서 비롯되는 더 큰 문제들은 깊이 생각해보지도 않았다. 이를테면 죽은 뒤에 어디에 묻힐지, 나이 들면서 기억의 저장고가 조금씩 깎여나갈 때 어떤 언어의 어떤 단어를 잊어버리게 될지.
이 날 밤이, 돌아온 이후 두고두고 잔잔하게 나를 받치고 있는 기억들 중 하나이다.

출장 기간에 'いきどまり' MV 티저가 공개되었었다. 전날밤 호텔방서 업무를 마무리하고 봤던, 그 짧고 제한된 영상 속에서, 뭐가 또 그렇게 하늘 무너진 듯 무겁게 잠긴 참담한 얼굴인지, 차가워 보이는 저 밤바람은 과연 이런 바람인지 생각하면서 추운 가을바람도 좋다고 걸었던 것 같다.
아, 역시 도쿄역 근처 KITTE Marunouchi도 즐거웠다. 업무로 꽤 다양한 상업시설에 방문했었는데 그 중 가장 좋았다. 과거 도쿄 중앙 우체국이었다던 옛건물을 현대적인 방식으로 개조, 증축한 건물이었는데, 고풍스런 라인의 흰 벽과 유리 난간이 맞닿아 삼각꼴로 이어진 공간이 몇 번을 보아도 질리지 않고 좋았다. 로컬 소상공인들의 제품들을 큐레이션해놓았다는 상점들도, 막연히 뻔하고 형식적일 거라 생각했던 것과 달리 보는 재미가 있었다. 꽤나 지갑이 위험할 뻔 했다. 일 때문에 갔으니 자세히 둘러보는데는 제약이 있었는데 언젠가 도쿄에 간다면 좀 더 시간을 두고 방문하여 찬찬히 살펴보고, 선물 한 두개를 사오고 싶다.


그나저나 익숙하다 싶었는데, 겐상 2021년 CDTV 크리스마스 라이브 했던 곳이네. 와 그 공간의 소리 울림은 어떠셨을지, 또 얼마나 신나했을지.










또 뭐가 있을까.
미야시타 파크에서 잠깐 올려다봤던 가을 하늘도 가끔 생각난다. 서울과는 살짝 다른 박자의 가을이었다.



이곳저곳을 다니며 생각했던 건, 도쿄란 건 뭐랄까, 덜 흉내낸 도시. 민망한 어설픔이 비교적 적은 도시. 뭐 내가 좋은 것들만, 잘 된 것들만 추려서 봐서 그럴 수도 있지만. 오히려 철저하고 견고한 계급체제가 전제되었기에 그런 깔끔한 나눔과 구현이 가능한가 싶기도 했고.
무튼, 돌아와 한 계절이 지나고보니, 10월 혼자 걸었던 도쿄와 11월 출장지의 도쿄가 마치 하나처럼 묶여서 떠오르곤 한다. 어쨋든 회사돈으로 10월의 뒷풀이를 했나 싶기도 하고 ㅎㅎ. 나쁘기만 한 것들은 없는데. 지나고보면 분명 기억하고 남길만한 중요한 것들은 분명 있는데. 너무 무거운 마음으로 다녔나, 이제와 흐릿하게 생각하며. 언제 다시 도쿄에 갈지는 모르겠으나, 한 번은 정리해두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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