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주 휴가를 내고, 9박 10일 오키나와를 다녀왔다.
지난 가을 구마모토에 다녀오고 일주일도 채 되지 않았을 때, 항공사 특가 페이지에 원활하게 접속된 게 신기해서(선착순 클릭의 세계에서 늘 광탈하는 나니까), 여행이 주는 잠깐의, 그러나 압도적인 생기가 그리워 오키나와와 홋카이도 중 "따뜻한 곳을 가자"라는 짝궁의 말에 오키나와표를 덜컥 예약했다. 예약하고 찾아보니, 더 사람이 없다는 오키나와의 부속섬들에 가고 싶어 며칠을 연장하여 티켓을 다시 끊었다. 내년 3월에 이직을 하는 텀에 가거나(매우 희망사항) 안되면 무급휴가를 받거나 아니면 회사를 때려치우고 간다, 라며 호기롭게 예약했는데 호기롭고 말 것도 없이 정신없이 어느새 3월이 코앞으로 다가와 그냥 유급휴가를 썼다. 따뜻한 나라에 가자는 선택이 무색하게, 또 보홀에서의 얇고 가벼운 여름옷이 그리워 챙긴 여름옷이 민망하게, 3월초 오키나와는 봄이 오기 직전. 제법 춥고, 바람이 많이 불었다.
동트기 전 공항버스를 탔다. 코트 보관이 어려워 얇은 옷을 여러겹 껴입었다. 바지 안에 바지를 입은 건, 아마 엄마가 옷을 입혀주던 아이일 때 이후 처음 아닐까. 껴입기의 효과는 대단했다👍
신혼여행 이후 이렇게 함께 오래 집을 비운 건 처음이라고 이야기했었는데. 신혼여행을 떠났던 제2터미널도 오랜만이었다. 그 땐 좀 더 넓고 반짝거렸던 것 같은데, 군데군데 리모델링 중이어서인지 공항이 기억보다 좁았다.
가끔 하릴없이 공항에 앉아있고 싶을만큼, 그래서 여행이나 출장으로 비행기 탈 일이 있다면 출발전 3시간 전이 아니라 훨씬 일찍 공항에 갈만큼 공항의 소음과 공기를 좋아한다. 다만 이번엔 해야할 업무가 있어 공항을 즐기지 못했다. 비행기 안에서 책도 거의 읽지 못하고, 나하 공항에 도착.
일본에 입국하고, 짐을 찾아 국내선 수속을 하였다. 일본에서도 타자화된 섬. 그만큼 일상에서 벗어난 표정의 사람들, 작지 않은 규모의 오미야게 상점들이 많았다. 공항 내 적당한 식당에서 "토리아에즈 비루 세트"와 "소바 텐푸라 세트"를 시켜 점심을 먹었다. 오키나와의 첫 인상이라고 하면, 이 날 식당의 점원분들이 입은 하와이완 느낌의, 그러나 전혀 다른 전통문양의 헐렁한 티셔츠, 익숙하지 않은 음계와 리듬의 류큐 음악 (뚱땅거리며 울리는 특유의 현악기 소리와 휘파람 소리가 섞여있다), 그리고 고야와 햄. 일본 내 국내선 4위 규모인 공항, 군용 비행기가 뜨고 내리는 공항이라는데, 그만큼 쉴 새없이 크고 작은 비행기가 식당 창밖으로 뜨고 내렸다.
복작거리는 국내선 탑승구에 앉아 있자니, 교복을 입은 학생 단체나 양복을 입은 사람, 나이 지긋한 사람들도 찬찬히 눈에 들어왔다. 비가 꽤 오기 시작했다. 비행기가 40분 남짓 지연되었다. 이 때도 사실 일을 했는데, 노트북에서 잠깐잠깐 눈을 떼고 고개를 들어 돌아봤던 그 북적이던 탑승구나 빗방울이 꽤 맺혀있던 유리창이나, 비올 때의 특유의 눅눅해진 백색소음이 어쩐지 돌아온 이후에도 계속 생각난다. 이륙 후엔 1시간도 채 비행하지 않고 착륙했다. 그렇게 아침 5시 30분에 집을 나선지 12시간만에 목적지에 도착했습니다.
버스를 타고 호텔 근처의 정류장에 내렸을 땐 좀 당황스러웠다. 2층 이상의 건물을 찾아보기 힘든 한적함과 옛날 외할머니댁 골목에서나 보았던 도랑을 반쯤 가린 보도블럭들. 앗, 정말 작은 동네에 왔구나! 싶은. 섬의 섬으로 온 것이 실감났고, 과연 내가 섬을 좋아할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도 생겼다.
체크인을 하고 호텔에서 조금 걸어나오면 각각의 모퉁이에 우체국과 마사지샵, 은행이 있는 사거리. 여기를 한 번 건너면 각자의 분위기로 들어가고 싶어지는 가게들의 골목이 시작된다. 이시가키에 머무는 동안, 심지어 숙소를 옮겼어도, 이 사거리를 도보로, 차로 몇 번을 건넜는지 모른다. 제 동네처럼 겁 없이 후딱 다녀올만큼 익숙해진 장소가 생기고 정이 드는게 좋았고, 이 정도의 규모감이 참 좋다, 고 섬을 떠날 때즈음 생각했다.
이시가키규. 다음날 업무와 당시 복용중인 약 때문에 술을 마시지 못하고 우롱차를 마셨는데, 이런 야키니쿠에 우롱차를 마시니 <고독한 미식가>의 고로상이 된 기분.
오키나와 방언으로 인사말이라는 "하이사이"라는 이름의 가게. 기본 안주로 매콤하게 무친 모즈쿠를 내어주셨다. 아마 여지껏 일본에서 먹은 음식 중 가장 매운 음식이 아닐까. 우리나라에서 먹는 초장보다 살짝 더 매콤해서 놀랐다. 옆에는 얼굴이 빨갛게 취한 어려보이는 학생 무리. 오리온 무알콜을 마셨다.
바람이 제법 불지만 춥지 않아 딱 노상하기 좋은 밤이었다. 불 빛이 비교적 적은 항구까지도 금방이었다. 사실 별을 보러 이시가키에 온 건데 구름이 많았다. 술을 마시지 않았지만 딱 그 취하는 바람이라 한들한들에 약간의 폴짝폴짝을 더하여 걸었다.
대충 9년 전, 시칠리아의 시라쿠사였을까, 카타니아였을까. 짧지만 곧게 뻗은 2차선의 도로, 양 옆으로 줄지은 건물은 최대 2층의 나란한 건물들, 반질반질한 돌 바닥. 그 어디에서 젤라또를 사서 걸었을 때가 자연스레 떠올랐다. 고작 몇 번 안 되는 섬 여행 경험 속에서 겨우 찾은 단촐한 유사성일지 모르겠지만. 아까의 두려움이 무색하게 푸근해졌고, 고작 네 밤을 잡은 이시가키의 일정이 너무 짧다고 아쉬워하며 첫날 저녁을 보냈다.
백만년만에 달리기를 했다. 달리기를 시작하고나선 여행지에서 꼭 달리고 싶다고 생각해왔다. 걷기보다 빠르고 자전거보다 느린 달리기만의 속도로, 탈 것 안에 놓이지 않은 채 내 발로 땅을 밟고 지나며 풍경을 보기. 다만 국내 여행에서 몇 번 뛰지 못했고, 사실 작년엔 무릎부상으로 일상에서도 달리기를 쉬었다. 달렸다 말하기에 아주 민망한 3km 남짓의 거리였지만 아침에 다리 하나를 건너며 본 바다는 넓었다.
이름에 Breakfast가 들어간 호텔답게 조식이 아주 좋았다. 아주 부드럽게 삶아 찢어놓은 닭가슴살이 있는 샐러드바, 카이센동을 만들어먹을 수 있는 회와 재료들, 새우구이 등등.
오전 산책으로 페리터미널과 도서관 둘러보기 (feat. 망고주스). 도서관은 들어서자마자 바로 열람실과 연결된 점이 새로웠다.
사장님 부부 내외의 온갖 취향이 가득 담긴 카페에서 직접 만들었다는 진저에일, 각종 야채 튀김이 가득한 2가지맛 카레, 짝궁이 시킨 모링가 차. 모링가 차는 콩 향이 났다.
그리고 바나나 카페의 반질반질하고 묵직한 테이블에서 식후 커피.
낮시간엔 나는 일이 있어 호텔에서 시간을 보냈고, 짝궁은 전기스쿠터를 빌려 섬을 돌고 왔다. 여행지에서 혼자만의 시간을 잘 보내주는 짝궁이 고맙고 좋다.
그리고 드디어 일과 복용약에서 해.방.🎉🎉🎉🎉🎉
진짜 어제 여행 첫 날에 시원한 맥주도 못 마시고 얼마나 괴로웠는지😭😭😭
짝궁이 스쿠터를 반납하는동안 유글레나몰의 아기자기한 유리공예 제품들을 구경하고 숙소로 돌아와, 라운지의 해피아워를 즐겼다. 숙소에서 도보로 유글레나몰 가서 한바퀴 구경하기, 짝궁은 페리터미널에 스쿠터 반납하고 유글레나몰로 걸어 돌아오기 - 이 모든 것이 아주 부담없는 크기의 작은 시내인게 새삼 더 귀여워졌다.
숙소에선 5-8시까지 투숙객 모두 해피아워를 즐길 수 있는데, 무려 오리온 생맥주 기계가 있고👍👍 아와모리 여러 종류를 맛볼 수 있다. 작은 로비에 앉아 제각각 일행과 여행 일정을 두런거리며 조용히 술을 즐기던 분위기를 잊을 수 없다. 해피아워도 그렇고, 조식도 그렇고 한 달 살기를 해야한다면 이곳?! 그리고 이렇게 해금의 반향으로 미친 음주의 밤을 보내게 되고....
아와모리를 마시는 여러가지 레시피가 안내되어있었는데, 자스민차와 함께 마시는 방법이 부드럽고 좋았다. 평소 자스민차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는데, 오키나와 본섬으로 넘어가서도 산핀차(さんぴん茶)라고 불리는 이 자스민차를 꽤 자주 즐겨 마셨다.
어둑해진 거리를 좀 더 걸어 트럭노상펍에서 2차. 피쉬앤칩스와 크래프트비어가 아주 맛있다고 하여 오기 전에 핀해 놓았던 펍이 트럭이자 노상 가게인 줄 몰랐다! 사장님은 요리를 전공한 스코틀랜드 사람이었는데, 홋카이도에서 일하시다가 이시가키로 넘어온지는 4년째라고. 구글 리뷰처럼 정말 바삭, 맛있는 피쉬앤칩스와 백만년만에 만나 반가운 브루독 캔이 있었다. 이미 취한 우리는 짧은 영어로 사장님과 꽤 신나게 수다를 떨고, 사장님이 추천해주신 바나나튀김 디저트(평소였다면 절대 안 시켰을 메뉴)까지 야무지게 먹고, 서비스 샷도 얻어먹었다. 아 이날 이 공간에서의 기억이 자꾸 떠오르고 너무 웃긴데. 일단 대문자 I 부부가 사장님께 저녁 그의 친구가 하는 DJ 파티에 초대받은 것도 너무 웃겼고(사실 언젠가 보았듯 다시 볼 일이 무척 적은 사람들 앞에선 말이 많아진다는 내향인 특성 진짜 대공감이다), 우리가 먼저 테넌츠 라거 이야기를 하자 사장님이 테넌츠 푸어링 매트를 꺼내보이며 자기 갑자기 향수병 온다고 한 것도 너무 웃겼고. 아 한참 이야기하다 어딘가에서 "펄럭펄럭"도 아닌 "퍽퍽" 소리가 났는데, 사장님이 위를 보라며 박쥐라고 말해주어, 생전 처음 전선줄에 매달린 박쥐를 본 것도 너무 놀라웠다. 몇 곳의 여행지도 추천받고 정말 뭘 많이 떠들며 놀았다. 곧 레스토랑을 오픈하실 거라고 하는데, 정말 꼭 다시 와 트럭이 아닌 레스토랑 개업을 추천해주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인스타 계정을 팔로우 했는데, 돌아온 지금까지 매일 성실하게 오픈을 알리는 스토리를 볼 때마다 반갑고 그립다.
짝궁이 핀해두었던 바에서 간단히 위스키를 마시고.
아까 보니블루트럭에서 추천받은 이자카야로 4차(미쳤나요?!). 반쯤 야외인 상가 건물에 시끌벅적 젊은 분위기의 술집이 가득했는데 다음날 아침에 지출기록 적어놓은 걸 보니 내가 '낙원상가'라고 적어놨더라 ㅋㅋ 나눈 이야기는 거의 기억이 안나지만 우엉 튀김을 포함하여 안주가 아주 맛있었다. "한걸음 한걸음"이라는 가게였다.
그리고 역시 반 노상 테이블에서 모즈쿠 빙수에 맥주를 마셨으나 전혀 기억에 없는 5차까지 하고 돌아왔다...
이렇게까지 마실 수 있지만, 사실 이렇게까지 마시고 싶진 않았다...🙄
그래도 다음날 심각한 숙취 모먼트는 없어서(없었나...?) 다행이었고. 취해서 걸어다니기에 모든 곳이 너무 멀지 않았고, 밤기온이 좋았다. 아직도 골목골목이 눈에 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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