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연말에 있었던 이야기. 어딘가 꼭 적어두어야지 했으나 9개월을 마음에만 적어두고 이제야 텍스트로 옮긴다.
2022년 4월 하나의 단골 술집의 클로징 파티에 참석한지 몇 주, 그 헛헛한 마음에 어디도 적응 못하고 퇴근 후 갈 곳을 헤메이다가 검색 끝에 "집 근처에 위스키를 잔 술로 파는 공간이 생겼는데? 이 동네에?" 하며 남편과 발걸음 한 곳이 바로 S.
술을 좋아하는 사장님 부부가 운영하는 공간. 우리보다 대략 10살 정도 많지만, 연애기간과 결혼은 우리가 빨라서 가끔 사장님들이 "어휴 선배님이시죠." 하며 농담을 하는 곳. 우리는 아일라 위스키 증류소로 신혼여행을 다녀온 사장님 부부를 부러워하고, 사장님 부부는 영화 <엔젤스 셰어>의 OST인 "The Proclaimers - I'm Gonna Be"를 결혼식 행진곡으로 튼 우리를 부러워하는 곳. 맛있는 술 얘기를 하면 끊이지 않는 곳. 술 얘기 아니더라도 만화책과 애니메이션, 국내 여행지 이야기를 해도 끊임없는 곳.
비 내리는 것을 보며 마시기에 창이 크고, 마시면서 책 한 장 읽기에 조명이 적당해서 2022년 참 자주 드나들었다.
사장님의 손맛이 좋아 철에 맞춰 새우며, 우니며, 과메기며, 봄동이며, 감태며, 어묵을 먹을 수 있었고, 너무 좋아하지만 다른 곳에선 비싸 자주 못 먹는 문어숙회도 정말 많은 양으로 한껏 먹을 수 있었다 (그리고 사장님의 특제 마늘소금장이 얼마나 맛있는지). 우리 동네 술꾼들의 성지.
정말 오랜만에 새로 사귄 술친구 또는 술선배이자, 사회생활과 인생 연차는 우리보다 훌쩍 앞서고, 연애기간과 결혼기간은 우리보다 조금 적은 사장님들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이런 저런 생각들을 새롭게 할 수 있었던 것 같다. 하던 일을 그만두고 취미이자 취향이었던 술을 업으로하는 이런 공간을 부부가 함께 차리는 것, 이 공간에서 종일 함께 손님을 기다리고 응대하는 것, 늦은 새벽 가게를 정리하고 집으로 돌아가 동틀 때와 가까운 시간에 함께 하루를 마치는 것, 사장님들의 하루를 가만히 생각해보는 것.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하나씩 새로 느낄 수 있는 가까운 타인의 생활.
지난 연말 회식 때 어쩌다 "올 한 해 나에게 영감을 준 것은?"이라는 주제로 각자들 돌려 말했는데, 나는 이 S라는 공간과 사장님 부부를 말했다. 영감이 무엇인지 모르지만, 타인에게 관심을 갖게하고 "나라면?"이라고 나의 새로운 가능성을 상상해보게 하고, 그게 활력을 주는 것이라면 충분했다.
사실 진짜 적어 남겨두고 싶었던 것은 이 다음.
이 연말 회식에서 며칠 지나지 않아 S의 1주년 파티(사실 가오픈을 1년을 하셔서 0주년 오픈 파티였다)에 초대받아 그 사이에 단골이 된 여러 사람들과 사장님들과 오래오래 축하하며 달뜬 마음으로 마셨다. 그동안 오가며 옆 자리 손님으로 봤던 분들과도 인사를 나누고. 사장님들도 오늘은 좀 더 편한 마음으로 드시고. 그러다 모두 한 껏 취해 저마다 얼굴도 붉어지고 목소리도 커지고 낯선 사람에게 인사를 하고 잔을 건네는게 어색하지 않을 즈음. 나도 한참 취해 무슨 이야기를 하다가 남자 사장님께 "아, 제 회사 회식 때 이런 이야기가 나왔는데요~ 올 한 해 영감을 준 것들에 대해 이야기하는데 저는 S를 이야기했어요! 그만큼 제게 의미있는 공간입니다."라고 말하였다. 그 때 남자 사장님이 잠깐 멈칫하시더니 잠시 있다가 조용히, 수줍게 조용히 말했다. "제가 저 사람에게 정말 고맙네요. 저 사람 덕분에 살면서 누군가에게 영감을 준다는 이야기도 들어볼 수 있네요." 그 감격스러운 얼굴에, 나는 내가 한 말이 누군가에게 그런 감격을 줄 수 있는지 미처 몰랐어서 너무 큰 말을 뱉은 사람처럼 당황했다. 사십대 후반, 아니 어쩌면 쉰이 넘으셨을까, 중년의 남성의 얼굴이 반려자에 대한 고마움을 숨기지 못하고 서서히 젖어들어가는 게, 지긋이 웃는 표정에 조금 놀라 가슴이 덜컥거렸던 것 같다. 이내 그 감동이 나에게로 옮겨왔지만.
그날 조명만큼이나 따뜻하고 오렌지색 기억이다.
사장님들 농담처럼 내가 결혼 선배라지만, 내가 사장님과 좀 더 비슷한 연배가 되었을 때 나도 누군가가 나에게 하는 말을 오롯하게 나의 짝궁의 덕으로 돌리며, 짝궁에게 한껏 감사를 표할 수 있을까. 그 마음이 진심의 가장 앞에 자리잡고, 숨기거나 꾸미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그 마음을 전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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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tbNlMtqrYS0?si=AJdiZtuoTlf2QGM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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