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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낭에서 꺼낸 이야기/2024_겨울_일본_산인

[2024 산인 여행] 겨울밤여행 03

by momorae 2025. 5. 6.

이즈모시의 켄죠소바 하네야에서 저녁을 먹었다. 이 지역에선 와리코라 불리는 둥그런 식기에 담겨나오며 여러가지 고명을 올라가는 이즈모 소바가 유명하다고 한다. 생각보다 면이 두꺼웠다. 모밀은 나에게 짝사랑 음식 중 하나라 (좋아하지만 잘 체함) 조금만 꼭꼭 씹어먹어야지 하고 와리코 한 단을 짝궁에게 주었는데, 금새 내 것 다 먹고 짝궁 것을 야금야금 뺏어먹음. 이제와서 찾아보니 에도시대에 연 유명 맛집이라고. 신지호와 나카우미호를 지나오는데 불빛이 적어 짝궁 운전이 고되었다. 호텔에 차를 세우고, 어제 갔던 CASE로 다시 향했다.

 

착착 쌓아지는 맛이 경쾌한 와리코

 

어제 CASE에 들렸을 때, 사장님으로부터 다음날(그러니까 오늘) 이곳의 자랑할만한 로컬 비어인 DisenG beer의 탭이 들어온다고 들었다. 종일의 바쁜 운전과 찬 바람의 피로를 맥주 한 잔으로 풀고자 가게 문을 열고 들어섰을 때 사장님이 바로 알아보시고 환영해주셨다. 다이센지비어 탭이 들어왔나요? / 앗, 아쉽게도 오늘 사정이 있어 들어오지 못했습니다. 어제와는 다른, 그러나 역시 단골로 보이는 아저씨 한 분이 안 쪽에서 드시고 계셨는데, 사장님께 우리가 어제 온 여행객이라는 이야기를 듣더니 그래도 여기에 왔으면 다이센지 맥주를 먹어봐야지 않겠냐며 갑자기 주변의 다른 가게에 전화를 돌리시는 것이었다 (여기서부터 뭐하시는 분인지 심상치 않음). 몇 군데 전화 끝에 병맥주가 있는 곳을 찾았다며, 가게를 지키고 있을테니 사장님께 지폐 몇 장을 건네며 맥주를 찾아오라고 함 ㅋㅋㅋ 아니 저희를 위해 그렇게까지요...? ㅋㅋㅋ 처음에 몇 번 괜찮다 손사레를 쳤지만 이미 사장님과 아저씨가 더 신나는 일이 되었기에 감사한 마음으로 그렇게 맥주를 얻어 마셨다. 감사의 마음으로 저희가 한 잔 사고, 만국의 술매니아들이 그러하듯 귀한 750을 따서 나눠 마시고, 그럼 우리도 이걸 딸테니 나눠드시죠, 하다가 거하게 취하고 말았다 ㅋㅋㅋ 사업을 하시는 분 같았는데, 쓰리피스 정장을 입고 계셨고 영어를 조금 하셨다. 취하면 외국어를 더 잘하게 되니까, 영어와 일어를 섞어가며 진짜 왁자지껄하게 다같이 깔깔 거리며 마셨다. 요나고엔 왜 오셨나요 / 하치미츠토크로바라는 망가에 돗토리 사구가 나와서 그걸 보러 왔습니다 / 그 만화에 돗토리가 나오는지 몰랐습니다 / ... / 여기엔 얼마나 오래 묵습니까 / 5박 6일을 묵습니다 / ... / 내일부턴 가이케 온천에 갈 예정입니다 / 가이케 온천이요? 저도 이따가 그곳에서 약속이 있어 가야합니다 / 오, 가이케의 맛집을 알려주세요 / ... / 가만 이곳에 또 갈만한 곳이 있나? / 오늘은 오다시와 이즈모에 다녀왔습니다 / 오다시요? 그렇게 먼데까지? / 네 운전해서요 / 한국과 방향이 반대지 않나요? / ... / 이와미은광에 다녀왔습니다 / 특이한 곳에 다녀왔네요 / ... / 두 분이 부부라고요? / 그럼요 저희 결혼한지 꽤 되었답니다 / ... / 이 야키니쿠집도 꽤 괜찮습니다, 비싼 편이지만 그래도 도쿄에 비하면 괜찮아요 / ... / 이카게무를 봤나요? / 이카게무가 뭐지? 아 오징어 게임, 죄송합니다 저희는 그걸 보지 않았습니다 / 제 아내가 이태원클라쓰를 좋아합니다 / 아하 저희는 그것도 보지 않았네요 / 하하 / 저희는 대신 일본 영화와 드라마를 몇 편 봤습니다 / ... / 가만 그 드라마에 나오는 남자 배우가 최근에 결혼하지 않았나? 아 이름이 뭐더라 / 오카다 마사키요 / ... / 대중없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끝도 없이 주고받다가 아저씨의 따님은 한국 가요만 듣는다고 하고, 우리는 우리도 그만할 때 일본 노래를 많이 들었다, 하고 얘기한 것 같다. 나중에 새로온 단골에게 사장님은 여기 도쿄는 안 가봤지만 돗토리와 구마모토엔 가본, 오징어게임은 보지 않았지만 마츠 다카코 상을 아는 희한한 여행객들이라고 우리를 소개하고 다시 어울려 한참을 마시고, 아저씨의 지인이자 우리가 묵는 호텔의 지배인이라는 분도 와서 또 마시고, 다이센지 비어 병따개를 선물로 받고, 그러고... 진짜 많이 마시고 필름이 끊김. 미쳤냐고. 근데 그냥 서로 아는 서로의 대중문화 이야기를 넘어 서로 여행 경험 이야기나 가족 얘기 등등 무슨 얘기들을 꽤나 주고받았던 것 같은데 기억은 잘 안난다. 진짜 많이 웃었던 것만 기억난다. 아저씨, 그 다음 약속은 잘 가셨는지. 취한 짝궁이 더 취한 나를 챙기느라 고생이 많았다고 들었다.

 

근데 맥주 라인업이 좋고 사장님이 맥주를 잘 따라요
선물로 받은 병따개

 

그리고 다음날 아침 엄청난 숙취에 시달렸다. 하루씩 번갈아 운전하기로하여 내 차례였으나 결국 조수석에서 그란데 사이즈 스타벅스 아이스 아메리카노와 (죽 대신) 세븐일레븐 시오 오니기리를 우물거렸다. 이 때 시오 오니기리의 맛을 알아버렸는데, 역시 순정이 제일이다. 그래도 아마 절대적인 양이 많았던 건 아닐거라(아마) 돗토리에 도착할 때즈음엔 제법 회복했었다(?).

 

사구에 가는 날이라 좀 더 맑길 바랬지만 가는 내 흐리고, 비도 몇 방울 떨어졌다. 어제와 달리 다이센산 방향으로 출발하며, 산에 가까워질수록 그 규모에 그저 감탄할 수 밖에 없었고, 가장 높은 봉우리 주변으로 굽이치는 산세들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9번 국도를 따라 달렸는데 꽤나 직선으로 뻗은 도로였으나 좌측엔 새로운 도로를 건설하며 버린 도로가 되었는지 도로 상태가 좋지 않았다. 달리는 내내 코난 박물관 표지가 계속 반복되었고, 심지어 지나쳤을 땐 '코난 박물관은 돌아서 몇 km'라는 표지가 나와서 어떻게든 코난 박물관에 보내겠다는 이 강한 의지가 좀 웃겼다. 어떤 부분은 마치 강릉에서 동해로, 삼척으로 향하는 도로와 너무 비슷했는데 내가 그 말을 하자 마침 짝궁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고.

 

돗토리 시내에 도착했을 땐 늦가을의 차가운 바람에 낙엽들이 굴렀고, 도대체 평일인데 왜 이렇게 도심지에 사람이 없는가, 짝궁과 갸웃거렸다. 차를 세우고 돗토리 현립 도서관을 좀 구경했다. 점심으로 무엇을 먹지 검색하다가 고독한 미식가에도 나왔다는 무사시야에 가기로 했다. 스라멘과 카츠동이 유명하다고. 스라멘은 우동과 라멘 사이, 숙주와 튀김 부스러기가 뿌려진 밀가루 면 음식. 옛날 후추향으로 먹을만한 소박한 면요리였다. 매우 저렴하게 해장 성공. 문 연 가게가 거의 없는 상점가를 걷다가 무인 쿠페빵 가게에 들려 빵을 하나 샀다. 여러모로 너무 사람이 없어서, 어떤 가게에서 나온 나이 지긋한 신사 분을 보고 '오 사람이다' 하고 신기해할 뻔.

 

돗토리 현립도서관과 적집자병원 교차하는 거리에서 그나마 사람들을 보았다
한 골목 안의 무사시야
반질반질한 나무 메뉴판. 도라마코리아에선 또 이걸 어떻게 번역/자막을 입혔을지.
슴슴한 스라멘
다녀가셨군요
쿠페빵 자판기
돗토리 식빵

 

그리고 15분 가량 운전하여 드디어 돗토리 사구에 도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