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낭에서 꺼낸 이야기/2024_봄_일본_오키나와

[2024 봄이 오는 오키나와] 오키나와 중부 : 세상의 모든 파란 물감

momorae 2024. 5. 21. 22:05

이시가키섬에서 읽기 시작하여 북부 마지막날 밤에 덮은 소설이 있었다. 엄청 고자극의 소설이라 정신없이 읽었지만 결말까지 뭐가 없어서 약간 분노. 무튼 북부 마지막날 저녁/밤 시간을 독차지했던 책을 털어내자 이제 밑으로, 정말 홀가분하게 나하로 내려 돌아가는 날. 여행의 새로운 구간이자 마지막 구간에 들어섰다는 걸 알려주듯 가장 맑은 하늘이었다.
 

 
올라올 때와 달리 동부의 도로를 달렸는데 확실히 이 섬의 허리에 미군이 있구나를 실감할 수 밖에 없었다. 미군기지의 희거나 회색의 높은 담장과 철조망. 건장한 모습으로 달리는 군인들. 커피를 테이크아웃하러 들린 브런치 카페의 메뉴판은 영어 뿐이고, 모든 테이블에 1명 이상의 백인. 만화 <머나먼 갑자원>으로 오키나와를 처음 알고, 가장 최근에 본 오키나와가 배경인 콘텐츠가 일드 <펜스>였던 인간은 괜히 뻘쭘해졌는데요...🙄 (매우 편파적)

 
*노기 아키코 작, 마츠오카 마유 출연의 <펜스>는 오키나와를 배경으로 미군 범죄, 여성폭력과 인종차별, 헤노코 미군기지 건설 등의 내용을 다룬다. 다소 교과서적이고, 누군가는 재미없는 프로파간다물이라고 하겠지만, 동시대의 이슈를 꼼꼼하고 촘촘하게 정면으로 담아내려한 대중 콘텐츠라는 점에서 늘 소중하다. 각키가 피해 청소년들을 돕는 정신과 의사로 특별 출연을 하는데, 이렇게 자기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는 여성 배우의 행보도 늘 응원할 수 밖에 없다. (틈새영업)
 

 
 
가쓰렌 성터에 도착했다. 새롭게 정비하여 개장한 듯한 넓직한 주차장에서 길 건너편으로 높은 성벽이 보였다. 나키진 성터보다 바다를 좀 더 가까이 둔 성.
 

 
생각보다 돌계단이 가팔라 엉금엉금 올랐다. 나키진 성터와 비교하게 되었는데, 나키진 성터가 스산하고 혹 비가와 축축하게 젖어도 어울릴 것 같았다면 여긴 날이 맑을 때 와서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비가 오면 쏟아지는 비를 정면으로 받아내야할 것 같았다.
 

펼쳐진 바다 역시 좀 더 사람이 개입된 풍경
성터의 '터'적 모먼트를 좋아하는 편

 
새롭게 관광자원을 활성화시키는 작업이 한창인 듯 보이던 성 아래 기념품샵에서 흑설탕 과자를 하나 샀다. 우루마시 안내도도 하나 집어들었다. QR코드를 스캔하여 스크롤 다운하는 웹페이지의 형태가 아니라 여전히 양쪽으로 활짝 펼쳐지는 인쇄 편집 디자인을 보는 것은 언제나 즐겁다.
 

 
 
그리고 해중도로를 달렸다. 쨍한 날 모두 같은 마음인지 그냥 지나칠 수 없다는 듯 차를 세워 바다를 보고 있었다. 점차 차고 있는 물밑으로 걸어들어가는 아이들이 있었고, 수상레저 장비를 등에 지고 성큼성큼 깊은 곳으로 걸어들어가는 어른들이 있었다. 도대체 어디까지 반짝일 수 있는지. 지난 며칠 흐려도 멋진 오키나와였지만, 아마 호불호 없이 모두가 좋아하는 오키나와는 이 오키나와겠구나, 너무 자명했다. 그저 좋았고, 아름다웠고, 여유로웠다.
 

 
 
미야기섬으로 넘어가 점심을 먹었다. 정말 "일본 영화" 감수성 그자체의 식당이었다. 직접 잡은 물고기를 야생적으로 튀기듯 굽거나 회를 떠서 팔고, 한 켠에선 동네에서 자란 야채를 팔았다. 지긋한 연배의 동네 주민들이 가득했다. 이른 오후에 장사를 마치는 가게였기에 우리가 갔을 때 이미 몇몇 메뉴는 재료소진으로 주문이 어려웠다.
 

@ 海畑食堂 てぃあんだ
이름모를 생선통구이(라고 쓰고 마늘 튀김이라고 읽는다)와 오키나와소바&amp;회덮밥 정식

 
해초와 생선살을 넣은 된장국이 정말 시원했고, 모즈쿠도 요 며칠 먹은 것 중 가장 신선했다. 강원도 식당의 미역국이 그렇게 맛있듯 여기도 어촌의 해초가 남다른가보다.
 

계산대의 오리온x7 "고치소사마데시타"

 
 
다음 목적지는 소금공장해피클리프. 딱히 미리 알아봐두고 온 곳은 아닌데, 우루마시 관광안내도에 해피클리프는 꼭 가봐야한다고 적혀있어 별 기대 없이 갔다가 가장 인상깊었던 곳 중 하나. 눈에 보이는 광경을 도무지 믿을 수 없어 보고 또 보았다.
 

 
와, 지금 블로그 쓰면서도 사진을 몇 개로 줄일 수가 없다 (제발 PC로 봐주세요). 어떻게 이렇게 맑고 파랗고 한없지. 비록 높은 절벽에서 내려다보는 것이지만, 이 자연의 반경 안에 감히 인간이 우리가 들어와도 되는 것일까, 오랫동안 아주 적은 사람들에게만 발견되고 누려져야할 곳을 이렇게 관광지화해도 되는걸까 (비록 지금 내가 그 수혜를 누리고 있지만) - 그런 끝도 없는 생각이 꼬리를 물었다. 깊은 절벽 아래 다시 깊을 게 분명할 바다가 투명하게 속을 드러내보이고 있었고, 오키나와에서 가장 좋은 바다 중간에 치는 파도가 펼쳐져있었다. 경탄에 젖은 사람들의 소리가 제법 시끌시끌했으나 사람 소리를 지우는 바다 소리와 바람 소리만 결국 기억을 메웠다.
 
사실 만좌모도, 헤도곶도 다녀왔겠다 절벽이 새삼스럽겠느냐 싶었는데 새삼스러웠다😁 황홀했고, 눈부셨다.
절벽에 서서 맞은편 절벽의 바위를 하나하나 훑는다. 저기는 결코 밟힌 적이 없겠지. 끊임없이 파도가 깨지는 수면을 본다. 저기는 결코 건너진 적 없겠지. 눈에 담기나 막상 닿는다면 보기보다 크고, 깊고, 넓을 것들을 보며 가볼 생각도, 건널 생각도 감히 하지 않는 절로 숙연해진 마음새가 조용하고 좋다. 사람이면서 사람에게 정복되지 않을 것을 보는 게 왜 이렇게 좋을까.
 
소금공장을 갔다가 떠나기 아쉬워 다시 해피클리프에 들려 잠시 앉아있었다.
 

눈처럼 내려 쌓인 소금
소금 찹쌀떡을 사서 해피클리프 앞에서. 행복했다.

 
 
클리프 비어에서 수제맥주를 픽업했다.
비슷비슷한 가게 문 앞에서 한참 헤매어 들어간 클리프 비어의 분위기가 무척 좋았다. 대관행사가 있어 어차피 테이크아웃만 가능하였는데, 한낮의 튤립잔들에 담긴 오렌지색 맥주들이 너무 맛깔나보여 그냥 나몰라라 앉아 서서히 취하고 싶은 마음이었다. 그만큼 유혹적이었다, 가게에 들어오는 빛들이.
 
 
그리고 나카구스쿠로.
아침부터 햇볕 속에 돌아다녀 약간 지치기도했고, 벌써 세번째 성터이니 뭐가 비슷하지 않겠나 싶었지만 또 완전히 달랐다. 더 높고 크고 겹겹의 벽들, 멀리보이는 것으로 바다보다 밀림같은 더운 나라의 늘어진 나무가 더 인상 깊은. 성터 공원의 규모도 가장 컸다.
 

 
세 개 성 중 가장 보존이 잘 되어있다고하는데, 찬찬히 둘러보면 자연스레 몇 중으로 성이 지어졌는지, 가장 정직하고 우직한 방식으로 적의 침입으로부터 지켜내고자 했는지 알 것 같았다.
 
느지막히 들어갔던 성이기에 다 둘러보고 나올 때는 거의 폐장 시간에 가까워졌고, 종일 반짝였던 해도 한풀 꺾여있었다. 종일 걸었기에 조금 지쳐있었고, 하루가 끝났다 싶었다. 나하시의 새 호텔로 돌아가는 동안 오늘 보았던 수많개의 바다를 생각했다.
 
그림을 그리는 사람에게 오키나와 블루는 영감일까 저주일까. 세상의 모든 파란 물감을 가져다 그릴 것이 끊이지 않는 축복일수도, 세상의 모든 파란 물감을 가져다써도 영영 완벽하게 재현할 수 없어 자괴할수도. 그래도 이곳에 기약 없이 머물 수 있다면, 매일 다른 바다 색을 관찰하는게 내 일이라면 좋겠다. 이미 잊어버린 중학교 혹은 초등학교 과학 시간의 '빛과 색상의 원리'을 어렴풋 떠올릴 수 밖에 없었다. 햇빛에 따라 수없이 변하는 무궁무진한 바다의 색에 대해.
 
확실히 오키나와가 그리울 거라 확신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