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봄이 오는 오키나와] 오키나와 북부: 부서지기
이번 오키나와 여행을 요약하라면 { 이시가키 - 오키나와 북부 - 나하 } 또는 { 등대 - 성 - 맥주 } 또는 { 바람 / 바다 / 도로 }.
오키나와 본섬으로 돌아와 여행의 두번째 구간에 들어섰다.
이시가키에서 오전 비행기를 타고 나하 공항으로 돌아왔다. 나하 공항에서 아주 체계적으로(?) 운영되는 도요타 렌트카 셔틀을 타고 거의 강남 운전면허시험장만한 렌트카 사무소에 들려 차를 빌렸다. 와 1차선이 아니라 무려 4차선이라니, 사람이 이렇게 복작이다니, 건물이 높다니, '와 도시로 왔네' 하며 농담을 했다. 이시가키에 머무는 내내 날이 흐리고 바람이 많이 불고, 여기저기 넓은 사탕수수 밭이 있어 독일에서 지냈던 기숙사 옆 들판이 자주 생각났었다, 그 때의 우울함도 약간. 오키나와 본섬은 여행의 새 페이지를 시작했다는 듯 날이 쨍했다.
나하 시내에서 북부 모토부쵸의 숙소까지 가야했다. 중간에 중부의 아메리칸 빌리지에 들려 타코라이스를 먹었다. 내내 맛있었던 오키나와 음식이지만 약간의 매콤한 느끼함이 필요했던 시점이었을까, 너무 맛있게 싹싹 긁어먹었다.
나이가 들수록 날씨에 취약해진다. 흐린 바다도 사랑했지만 날이 쨍한만큼 눈이 부신 바다도 좋았다. 딱히 엄청 취향인 동네는 아니지만 꽤 들떠 걸어다녔다.
커피 한 잔 테이크아웃해서 다시 바지런히 이동하고자 코너를 꺾자 등장한 "CHATAN HARBOR BREWERY"에 짝궁과 동시에 "브루어리이~?" 외쳐 좀 웃겼지만 아직 문여는 시간이 아니라 그대로 패스.
나하에서 중부로, 그리고 북부로 이동할수록 계속해서 차창 밖 풍경이 달라졌다. 장르가 다른 음악들의 뮤직비디오를 붙여놓은 것 같았다.
만좌모에 들렸다. 약간 시큰둥하게 들어갔는데, 생각보다 거칠고 높은 절벽에 부서지는 포말이 크고 눈부셔서 무서운줄 모르고 자꾸만 울타리 가까이 서게 되었다. 절벽보단 부서지는 파도가 더 매혹적인 곳이지 않은가.
정말 넓게 뻗은 바다. 굽은 고개길이나 산, 절벽에 가릴 것 없이 넓은 바다를 왼쪽에 두고 달렸다. 아직 일몰은 아니었으나 곧 지기 시작할 해가 바다의 규모에 맞게 이글거렸다. 달리는 길에 미군기지 건립을 위한 헤노코 연안 매립 사업 반대 시위를 보았다. 도대체 어떻게 이 바다를 감히 메울 생각을 하지.
꺽어들어온 모토부초는 확실하게 좀 더 작은 규모의 어촌 마을 분위기를 풍겼다. 아마 여름철엔 좀 더 활기찬 가성비 숙소겠으나 아직까진 조금 스산한 도로변 반(half) - 무인모텔에 짐을 풀고, 세소코섬의 폐장된 해변으로 가 해가 진 직후의 바다를 재빨리 보고 나왔다. 재빨리 본 이유는 추웠기 때문😂 근처에 밥 먹을 데가 거의 없어 가로등 적은 마을골목을 이십여분 걸어 작은 가게에서 치맥을 했다. 우리나라로 치면 '청년 XX' 일 것 같은 가게였는데 나름의 김치를 기본안주로 내놓고 치킨과는 약간 다른 닭요리를 파는 곳이었다, 괜찮은 시도였습니다, 일본 청년들. 아까 걸어온 인적없는 동네가 무서워 차가 쌩쌩달리는 도로의 가로등 없는 인도를 걸어 돌아왔다.
오키나와 본섬에선 성터를 기준으로 동선을 짰다. 딱히 성 덕후도, 역사 덕후도 아니지만, 언젠가의 여행부터 성터나 산성이 있다면 하나씩 다녀보고 있다. 언덕이나 성벽을 오르며 약간 숨이 가쁜 것이 좋다. 통치자와 권세가가 선점한 눈높이와 시야겠으나 그 권능이 사라진지 오래라는 허무함이 좋다. 현대 도시인으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비좁은 규모이이겠으나 꽤 복작거렸을 곳이라는 걸 상상하는게 좋다.
아침 일찍 나키진 성터를 들렸다. 14세기 오키나와는 북부, 중부, 남부의 세 개 권력에 의해 통치되었다고 한다. 그 중 북부 호쿠잔의 성. 그리고 이번 여행에서 가장 좋았던 성터였다. 성의 중심부로 오르는 계단부터 좋았고, 성 뒷편의 마을터가 특히 좋아 한참 머물렀다. 4개의 건물이 있었다는 시지마 마을. 여기서 누가 물을 긷고 밥을 차렸을까, 여기서 자란 그 때의 여성은 바다를 보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런 상상을 하며 잠깐 앉아있었다. 떠나기 좀 아쉬웠네.
아직도 식당들이 점심 장사를 시작하기 전인 이른 오전. 코우리 대교를 넘어 코우리섬으로 갔다. 아니 오키나와의 아름다운 블루라는 게 한 가지 색이 아니었나. 이시가키와 다케토미에서 본 색과는 또다른 말도 안 되는 블루가 섬을 둘러 펼쳐져 있었다. 말도 안 돼, 바다가 어쩜 이래. 그런 말들만 계속. 나의 미천한 어휘력이 정말 부끄럽고 아쉬웠다.
테라스가 있는 카페에서 이르게 점심 식사를 했다. 해가 높아짐에 따라 더 넓은 색상 팔레트를 펼쳐 보이는 바다가 그저 신기했다. 여느 여행 때보다 밥/정식 식사 비중이 높으나, 이제 그게 가장 속이 편한 나이가 되었다며 조금 웃었다. 나는 바다포도도 제법 괜찮았는데 짝궁은 그닥이라고. 물론 바다포도보다는 모즈쿠가 더 맛있었다.
그리고 오키나와 북부의 북부, 얀바루의 대석림산을 목적지로 셋팅하고 58번 도로를 달리기 시작했다. 이번 여행에서 가장 잊지 못할 드라이브.
인적이 드문 북쪽으로 달린다는 것, 바람과 파도 소리만 들리는 거대한 바다를 옆에 두고 달린다는 것은 이시가키에서도 해봤던 일이지만 훨씬 훨씬 더 규모감이 크다고 해야할까. 더 거칠다고 해야할까. 끝도 없이 뻗어있을 것 같은 도로에 우리만 달리고 있고, 모든 소리도 삼켜버리는 바다를 보고 있자니, '죽고싶다'라는 생각은 아니지만, 그냥 저 파도랑 한 몸이 되어 휩쓸리고 부서지고 싶다는 생각, 삼켜지고 싶다. 저 바다가 되었으면 좋겠다, 아니 어쩌면 이미 그런 것이다, 이 대자연 스케일의 에너지의 역동 속에 나는 한 점의 의미도 없다, 따로 고려될만한 변수도 이상치도 아니다, 그냥 범위 안에 있다는 생각을 했다. 운전하며 짝궁은 무엇을 느꼈을까. 그도 좋았겠지만, 우리는 좋아서 굳이 어떤 말도 하고 싶지 않았다. 차안의 적막이 좋았고, 사람의 말 소리같은 걸 섞고 싶지 않았다.
올라가는 길에 송태섭 생가가 있을 헨토나 마을을 창밖으로 보았다. 와 정말 이런 깊고 깊은 어촌이었구나, 저 절벽에서 울었나보구나 싶어 조금 애틋해졌다. 퍼슬덩 보면 절벽이 거칠고 구멍이 숭숭 뚫려있잖아. 왜 그런 그림이었는지, 왜 그렇게 그릴 수 밖에 없고 그게 정확한 묘사였는지 북부 지역의 땅과 바위를 직접 보고서야 깨달을 수 있었다.
기암석산인 대석림산을 돌았다. 약 2억년 전 석회암층의 결을 따라 산성의 빗물이 스며들고 시간이 흐르는동안 침식된다. 지표면에 드러나 녹은 녹은 부분과 지하에서 녹은 부분이 다르다. 도저히 믿을 수 없이 생긴 돌과 바위들은 그렇게 생겼다.
간단히 한 바퀴 돌아보자, 라고 했지만 나뉘어진 4개의 코스를 모두 돌았다. 대석림산에서 좋았던 건 그 자연의 생김새나 풍경 뿐 아니라 공원으로서의 UX. 총 4개의 코스가 각 색깔을 가지고 있고, 각 색깔에 맞는 화살표 표지로 누구나 텍스트 없이 쉽게 길을 찾을 수 있었다. 한편 이 험한 석산에 배리어프리 코스가 있다는 것도 너무나 놀라웠다. 실제 휠체어를 탄 가족과 또는 유모차를 끌고 아이와 함께 온 사람들을 보았다. 높은 곳의 석산이다. 모든 루트를 다 배리어프리로 만들기는 어렵겠지만 분명 함께 누릴만큼의, 직접 누릴 수 있는 부분을 찾을 수 있다. 누가 감히, 무엇을 이유로, 포기시키는가. 반얀트리 코스에선 정말 끝도 없는 보리수를 보았다.
알찬 시간을 보내고, 다시 10여분 차를 몰아 헤도곶에 도착했다. 동중국해와 태평양이 함께 있는 곳. 아무리 몸을 단단하게 세운들 소용 없는 바람을 맞으며 파도를 보는 건 왜 질리지 않을까. 한참을 보다가 헤도곶 카페에서 세상 맛있고 따뜻한 핫초코를 마셨다.
광고 업계에 와서 좋은 건 뭐냐면, 15초만 찍어도 꽤 많은 걸 담을 수 있으며, 다시 보기에도 부담없는 좋은 길이라는 것을 알 수 있 게 된거야.
진짜 바다의 색이란 건 저 먼 바다 부근의 색일까, 이 앞에 부서진 파도의 색일까.
밤에 58번 국도를 타고 달리고 달려 이곳에 와 별을 보면 그렇게 쏟아진다는데, 황홀할 게 자명할 그 풍광이 궁금하면서도 그 밤에 그 인적드문 도로를 달려오고, 다시 돌아가야하는 건 좀 무서울 듯 했다. 무튼 평생 이곳에 머물 수는 없으니 아쉬운대로 돌아가야했다.
풀숲이라기엔 좀 더 크고 축축 늘어진, 그래도 이곳이 더운 섬이라는 것을 알게하는 식물들이 우거진 도로를 달리는 건 좀 흥분되는 일이었다.
돌아오는 길 지역 양조장이 있어 몇 개 맥주를 픽업하고, A&W에서 버거와 튀김을 포장해 일찍 숙소에 돌아왔다. 이 때 숨죽여 정신없이 읽던 소설이 있어(하지만 그러지 말걸 너무 후회돼) 꽤 이른 저녁부터 숙소에서 보냈다. 여행의 절반쯤이 된 밤이었다. 어쩐지 조금은 날이 서 있었는데, 그래서 그냥 그 바다 옆에 가있고 싶었다. 거기에선 무엇이든 날 서고 예민하고 걱정하고 할 것도 뭣도 없게 느껴지거든. 그냥 내 자신이 무(無)에 조금은 수렴할 수 있을 것 같거든.
걱정이나 한숨을 마음껏 부술 수 있던 지역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