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봄이 오는 오키나와] 이시가키② 바람과 바다
두번째 조식. 어제와 또 다른 메뉴에 감탄했지만 현실은 숙취로 오키나와 소바 국물이나 좀 먹었다.
하지만 어제 아침 살면서 처음 "로스트비프가 맛있는 음식이구나" 깨닫게 해준 로스트비프는 포기하지 못하고 그와중에 몇 점 더. 사진도 찍었다.
체크아웃 하고 숙소에 짐을 맡겨두고 페리 터미널로. 다케토미로 오고가는 왕복 티켓을 끊었다. 이온음료를 하나 사서 붙잡고 배에 올랐다. 꽤 좌석이 많았네. 대충 10여분 남짓의 짧은 거리였는데, 그래도 바다 가운데로 나간다니 창밖으로 생각보다 높게 출렁대는 물결이 좀 무서웠다.
사실 다케토미에서 자전거를 타기 위해 지난 가을에 자전거를 배웠건만, 결과적으론 못 탔다😭😭😭
일단 배웠던 자전거보다 훨씬 높은 바퀴의 자전거였고, 숙취였고, 그 와중에 어제 봤던 업무의 연장선으로 무언가 잔뜩 신경쓰고 급히 연락을 돌려야할 일이 생겨 그 어느 것에도 집중하지 못했다. 이 모든 정신없음에 자전거를 왜 못타는지 이해를 못한다는 듯한 짝궁도 원망스러워 잔뜩 짜증을 내고 말았지만. 무튼 이번 여행 속상 모먼트. 다케토미 전통 가옥들 사이로 시원하게 자전거를 타는 스스로를 얼마나 많이 상상했는데. 다음번에 올 땐 - 다음번에 올 일이 있을까 - 꼭 타고 이 골목골목들을 누리고 싶다.
자전거를 반납하고 결국 곤도이 비치로 걸어가기로 했다. 중간에 망고주스를 테이크아웃하려고 들어선 가게의 원목 테이블과 의자가 반질반질하니 멋있었고, 망고주스도 정말 맛있었다.
사람 없는 길을 건너 저 멀리 곤도이비치 입구가 보이기 시작했는데, 저 멀리 슬쩍 보이는 바다 색에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자전거를 타고 앞서갔던 다른 여행자들도 비슷하게 비치에 도착했는데 모두가 저마다의 언어로 '우와'라고 감탄했다. 들어서는 모두가 입을 벌리는 풍경이었다. 와, 오키나와의 바다색이란 이런 거구나.
카메라에 다 담기지 않는 바다색이었다. 처음 보는 바다색이었다. 예쁘다던 보홀 바다도 얼마전에 다녀왔고, 그 전에 아름답다던 지중해의 바다도 제법 봤는데 정말 이런 블루는 처음이었다. 바다가 이런 색일 수 있어?! 하는 감정, 경탄. 바람이 많이 불었다. 앞서 자전거와 씨름하느라 시간을 버려 오래 머물 수 없었다. 다음엔 따뜻하게 입고 돗자리 하나 책 하나 들고 와서 반나절 앉아있고싶어.
항구로 가는 셔틀버스를 놓칠까봐 돌담길 사이를 헙헙 뛰어 겨우 돌아왔다.
페리를 타고 돌아와 터미널 근처에서 무스비를 포장하여 버스를 타고 렌터카샵으로. 오릭스 렌터카를 처음 빌렸다! 왜냐면 공항 근처에만 있는 도요타와 달리 지점이 여러 개라 시내에서 빌려 공항으로 반납이 가능했기때문! 그리고 이번 여행에서 가장 기대했던 에어비앤비 숙소에 도착하여 구석구석에 감탄하고(여기가 내 집이었으면), 바다가 보이는 툇마루에서 포장해온 무스비를 먹었다. 사실 오전까지도 업무 연락으로 정신 없었기에 진짜 긴장 & 예민 덜어내고 한 숨 돌리며 느긋하게 보낸 순간이다. 행복했달까:)
📌 셋째날, 시계방향으로 돌기 : 우간자키 등대 - 카비라만 공원 - 타바가 해안 - 카비라만 전망대 - 다마토리 곶 전망대
📌 넷째날, 북단 다녀오기 : 히라쿠보 등대
무스비를 든든히 챙겨먹고 (한 사람당 두 개씩!) 운전해서 섬의 왼편을 돌았다. 전날 짝궁이 혼자 스쿠터로 돌았던 길과 조금 겹쳤다. 대체로 창 밖 풍경은 눈을 뗄 수 없었고, 가끔은 그냥 아무데나 차를 세우고 바다를 봤다. 우간자키 등대를 향하기 전 저 멀리 튀어나온 곶을 바라볼 때, 크게 굽은 해안을 바라볼 때 멀고 거대한 게 내 시야에 담긴다는 게 늘 놀랍고 감사한 기분이었다. 드라이브를 하고 편의점에 들려 장을 보고 저녁을 먹었다.
넷째날은 '한껏 숙소에 늘어져있기'를 계획한 날답게 푹신하고 넓은 침대에서 오래오래 자고, 가볍게 운동을 하고, 책을 읽다가 느지막히 숙소를 나섰다. 운전대를 내가 잡았다. 그리고 오르고 올라 히라쿠보 등대로 향했다. 작은 섬이라 대체로 한적했지만 북쪽으로 올라간 어느 시점부터는 정말 야생의 느낌이었다. 사람이 주인이 아닌 땅. 등대에 들렸다가 적당히 바다가 보이는 카페에 들리려했던 계획은, 번번히 들리는 카페마다 사람 없음, 문 열지 않음 등등으로 실패하고, 거의 숙소 근처인 동네 카페에서 의외로 맛있는 카르보나라를 먹었다. 편의점에 들려 장을 보고 내일 수하물로 무거울 병맥주들을 마셨다.
우간자키 등대로 가는 드라이브.
우간자키 등대. 바람이 정말 많이 불었다.
등대는 바람을 정면으로 맞서는 곳에 세우는 것이라는 걸 새삼 깨달았다.
바람이 정말정말 무서워서 등대 뒷편으로 오르려다 목숨의 위협을 느끼고 기어 내려왔다.
가비라만. 쨍한 날에 왔다면 그 아름다움이 뭔지 더 잘 알 수 있었을텐데.
작은 섬들 둘레둘레 고요한 바다와 능선이 구성적으로 아름다운 곳인 건 알 수 있었다.
타바가 해변. 전날 보니블루 트럭에서 추천받았던 해변이다. 관광지가 아니다보니 가는 길 내내 '여기로 들어가는 거 맞아?'하면서 풀숲을 헤쳐 갔다. 그게 꼭 삼척에서 부남해변을 찾아갔던 기억과 많이 닮아있었다. 세워진 다른 차들은 뭐지 싶었던 주차장 마저도.
사람이 드나드는 곳은 바람과 바다가 조금은 순하게 다가오는걸까? 아니 바다와 바람이 순한 곳이 사람 많은 해수욕장이 되는거겠지. 함부로 이런 곳을 찾아온 인간 따위 조금도 신경쓰지 않는다는듯, 우리의 원래 세기와 거칠기는 이정도라는 듯 치는 파도에 늘 압도된다. 감히 찾아와서 죄송합니다, 하는 마음.
가비라만 전망대에서 왜 가비라만이 아름다운지 좀 더 이해했다. 수묵화를 그릴 법한 남도해안과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좀 더 달려 다마토리 곶 전망대.
바다 가운데 파도가 치는 걸 보는 건 정말 지겨울 수 없다.
셋째날엔 내가 운전했다. 오기 직전 부리나케 짝궁에게 위임장 전달하며 국제운전면허증을 발급받아왔고, 운전 내내 '좌회전 작게, 우회전 크게'를 외쳤다. 그런데 오히려 한국보다 차 적고, 모두 천천히 달려 운전이 더 쉬운 느낌이었던 건 안 비밀-! 이바루마 지역에 들어서자 정말 날 것의 도로였다.
역시 바람이 미친듯이 불었던 히라쿠보 등대. 어제 우간자키 등대보단 사람들이 좀 더 있었다.
사람이 닿지 않는 곳이 더 많다는 사실이, 이러니저러니해도 인류가 망해도 이 땅이 사라지는 게 아니라는 사실이 주는 안도감이 있다.
오는 길에 우연히 들린 맹그로브숲. 난데없는 업무 일정으로 포기했던 이리오모테섬의 아쉬움을 여기서 간단히?!
진짜 쉬는 이틀을 보내자, 출발 전부터 다짐했던 날들이라 별다른 계획없이 보냈다. 달리고 싶은만큼 달리고, 다음 목적지는 그 때 그 때 구글맵을 켜서 적당히 정했다. 저 해안도로를 달려보자. 그랬음에도 지도로 그려보니 섬의 대부분을 돌았다는게 신기하고 웃기다. 바람이 정말 세차서 잠깐 뺨을 맞고 머리채를 흔들리고나면 정신이 쏙 빠졌고, 그런 채로 또 한참 웃었다.
에어비앤비 안즈쿠. 브런치 카페와 독채 단독주택 2개가 나란히 있는 숙소. 이시가키섬 숙소를 한참 검색하며 클럽메드나 호시노야 같은 고급 리조트만 침 흘리며 보다가 이 숙소에 먼저 머문 어떤 한국인 블로그를 봤다. 돌담 앞 의자에 누워 낮술을 하고 한들한들 동네를 걸어다니기 좋다는 후기에 쏙 홀려 예약했다. 구름이 잔뜩 낀 3월초의 이시카기는 생각보다 추워 방 앞 야외 테이블에 앉아있을수는 없었지만 여행지 늦잠이 달디달만큼 포근한 숙소였다. 밝은 색의 목재 인테리어와 화장실을 포함한 곳곳의 디테일이 좋아서 머무는 내내 기분이 좋았다.
또 정말 좋았던 건 조식. 오키나와 식재료와 전통음식들로 구성된 조식이 정말 맛있었다. 이틀 연속 먹었는데 메뉴가 다 달랐고, 직접만든 디저트까지 포함되어있었다. 아마 오키나와 전통 요리를 따로 사먹지 않을 수 있었던 건 (고야 참프루 같은 건 계속 사 먹음) 이 멋진 아침 식사 덕분이다. 둘째날 얇게 썰어 볶은 당근과 땅콩두부가 특히 맛있었다.
안즈쿠 뒷편으로는 사탕수수 밭이 있었다. 아침이고 밤이고 바람에 흔들리며 쏴아쏴아 파도같은 소리를 냈다. 주변으로는 소 목장이 있어 밤엔 불빛이 없다. 사실 그점을 노리고 남반구에 가까운 하늘의 별을 보러 갔던 것이 거의 유일한 우리 계획이었으나, 날씨 때문에 실패. 3월초보다는 좀 더 따뜻해진, 그리고 맑은 날에 다시 가고 싶고, 꼭 다시 갈 것이다.
계획 없이 다녔던만큼 의외의 것들을 먹었다.
앞서 보았던 안즈쿠 후기 블로그에서 동네에 꽤 맛있는 오코노미야키 집이 있다고하여 목장 거름 냄새를 맡으며 걸어갔는데, 하필 그날 임시휴무였다🤪 한참 검색하여 결국 차를 끌고 시내로 나와 다른 야키소바 집에 갔는데, 이게 정말정말 맛있었다. 야끼소바 두 그릇 먹을 수 있던 맛. 다음에 이시카기에 간다면 또 갈 것!
히라쿠보 등대를 보고 바다뷰 카페에서 조용히 책을 읽고 싶었는데, 첫번째로 간 카페는 염소만 있고 사장님이 안계셔서 그냥 나왔고, 두번째로 간 카페는 테이크아웃만 할 수 있고 앉을 데가 없었다. 직접 만든 여러가지 수제 콤부차를 파는 곳이라 두 종류 테이크아웃해나왔다. 세번째 카페는 도무지 문을 연 것 같지 않아서 결국 거의 숙소까지 다와서 주택단지 내에 있는 아무 카페나 들어갔는데, 파스타가 제법 맛있었다.
이시가키 머무는동안 매일 갔던 편의점은 패밀리마트 이시가키 이소베점. 아니 오키나와에 세븐일레븐이 현저히 적은 것을 알고 계시나요?! 출발 직전 알았다. 후쿠오카에서처럼 발에 채이는 세븐일레븐에서 하나카드 트래블로그로 돈을 뽑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공항환전 신청하며 얼마나 아찔하던지. 무튼 그래서 평소 일본 여행보다 패밀리마트와 로손을 좀 더 이용했다.
패밀리마트 이시가키 이소베점 앞에는 귀여운 시샤 동상이 있다.
오키나와에 온 지 다섯째날, 이시가키에 온 지 다섯째날. 오키나와 본섬으로 가는 비행기를 타기 전 잠시 근처 다른 해안에 들렸다. 떠나려니 내내 흐렸던 하늘에서 해가 빼꼼 나오기 시작했다. 개인적인 일로 완전히 여행모드로 ON이 될 수 없었음에도, 나흘간 다녔던 가게와 골목과 공설시장이 눈에 선하고 금새 정이 들었고, 호되게 맞았던 등대의 바람도 금방 그리워져 사실 좀 본토로 돌아가기 싫었다. 사람 많은 오키나와 본섬보다 이 곳이 더 좋지 않을까. 바다도 여기가 더 예쁘지 않을까 (물론 본섬에서도 본섬만의 오키나와블루를 엄청 즐겼다), 본섬에 가서 내내 이시가키에 더 머물걸 후회하면 어떡하지 그런 고민을 하기도 했다. 조용히 그런 아쉬움을 말하니 사실 짝궁도 그런 생각을 하고 있다며ㅎㅎ 섬에서 다시 섬이니까 오는 길이 아주 간편하진 않은 섬이니까, 그래도 콕 집어 여기에 다시 오자고, 다른 여행지가 섭하도록 더 진심을 듬뿍 담아 다짐했다. 그 전에 다시 오면 물론 좋겠지만, 언젠가 인생의 긴 휴식기를 시작하게되면 그 때 꼭 오고싶다. 분량이 너무 많지 않은 도시가 좋다. 너무 많이 변해있지 않길, 여전히 사람보다 자연이 더 큰 섬이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