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아간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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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벚꽃이 예쁘게 폈다. 꽃 피는 걸 딱히 기대하지 않을 듯한 사람들마저 설레보였다.
간이 피크닉을 하든, 조금 먼 곳의 식당을 다녀오든, 도시락을 빨리 먹고 산책을 다녀오든 저마다의 방법으로 일주일의 점심시간을 부지런히 즐기는 동료들을 보는게 꽃을 보는 것보다 들뜨는 일이었다.
회사 상황이 좋지 않아 다소 침잠해 다니는 분위기였는데, 딱 작년 이맘때만큼 화색이 돌아온 동료들을 보며 조금은 애틋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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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나기의 휴식>에서 스몰톡을 못하는게 다른 사람들이 속물적이고 배타적이라기보다 나 자신이 다른 사람들에게 지나치게 관심도 호기심도 없는 것이 아닌지 하는 지적을 보고 뜨금했었는데. 스몰톡에 대한 컴플렉스가, 다시 영어 회화 수업을 하며 살아나는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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짝궁과 계획에 없던 치맥을 했다. 요새 부쩍 술에 쉽게 취하는 짝궁이 아직 취하기전 어떤 이야기를 했고, 눈물이 핑 돌았는데 정확히 어떤 맥락이었는지 정작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다만. 내 부모도 차마 못해준 것을 해주겠다며, 이제 나에게도 옅어진 것들을 꼭 이뤄주고싶어 책임감을 가지고 있던 상대에 한없이 고마우면서도 아득해져 눈물밖에 안 나왔던 것 같다.
상처라기보단 흔적. 어렸을 때, 이미 지난 시절 부모와의 상호작용이 남긴 어떤 흔적들이 남들보다 오래 가고, 어떤 파동의 자장이 비교적 긴 두 사람이, 각자의 부모도 하지 못했던 걸 서로에게, 딱히 부모를 대신하겠다는 마음이라기보다 그저 상대에게 좋은 것을 해주고 싶다는 마음으로, 감히 타인인 서로에게 애쓰는 일들의 크기와 무게를, 나는 여전히 차마 가늠하지도, 갚겠다는 생각도 못한다. 언제나 고맙고 미안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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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새 하고 싶은 말은 많고, 빨리 뱉어내지 않으면 금방 까먹어서 마음이 급해 사람들의 말을 자르는 것 같다, 세보지는 못했지만. 의식적으로 말을 줄이자. 말하는 것보다 듣는 것이 집에 오는 길 더 즐겁고 가볍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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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말이나 비밀이란게 얼마나 오래 갈지, 멀리 갈지, 넓게 갈지 사실 그다지 믿음이 없어 이번주 종종 현타가 왔다. 그래도 크게 껄끄러운 일이 없도록 기왕 시작한 거짓말들이 오래 가면 좋겠다. 사정을 이해해주고 함께 말맞춰준 가까운 사람들에게도 민망하고 고맙고 죄송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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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없이 거대한 자연 앞에 '한낱' 인간인채로 서는 감각도 중요하지만, 그게 사람이 사람을 속수무책으로 내어주겠다는 건 아니니까.
나에게 한국에서 벌어졌던 자연재해는 인재로 구성되고 기억되었다. 이게 내게 익숙한 언어를 구사하는 내 사회, 그래서 좀 더 사정을 빠삭하게 알 수 있는 내 사회에서 일어난 일이어서 그런걸까. “현대”사회에서 인재가 아닌 자연재해라는 게 딱 잘라 존재할 수 있을까.
재난 자체로 사회가 찢겨지지 않길. 사회로서 재난이 지나간 자리를 재건하길. 난민과 유가족에게 충분한 회복의 시공간이 보장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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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쓸데없는 일'을 조금도 하지 않고 살고 있는 것 같다. 이렇게 살아도 되나. 언니들보다 늙고 버석한 마음으로 살면 안 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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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일의 수다와 토요일의 콘텐츠 소비로 문득, 내가 최근들어 더더욱, 남성성이 짙은 몸을 좋아하지 않는구나 깨달았다. 좋아하지 않는 것 이전에 생리적인 공포감이랄까. 한편, 최근 몇 년 조금이라도 섹슈얼한 관심이나 감각을 새롭게 느꼈다면 사람이든, 캐릭터이든 간에 대부분 여성이었구나 새삼스런 깨달음. 몰랐던 건 아니지만, 최근 몇 년 어떤 경향성이 더욱 짙어졌구나 싶은. 이런 류를 의식하는 건 이제 나에겐 드문 일이라 일단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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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타키형제와 사고팔고>를 다 봐서 <오오쿠> 애니메이션을 시작했다. 둘 다 좋아하는 여성 작가들. 작가를 좋아하는 건, 그가 꾸준히 쓰고자하는 (때로 어설프거나 실패하여도) 것들과 방향성, 그리고 그의 사람에 대한 전제를 믿는다는 것. 그런 믿음이 있기에 다소 안락한 기분으로 감상하게 된다. 한편 이런 안락한 감상만 하다가 사람이 더욱 좁아지는 건 아닌지 문득 불안해지기도. 사람이 몇 살까지 폭을 넓혀갈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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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들과 회사에서 만나는 어떤 계급성들에 대해 이야기했다. 결국 외면적이고 파편적인 단서들을 가지고 타인의 계급성에 대해 쉽게 판단하지도, 예민하게 굴지도 말자, 싶지만 머리에 힘을 주지 않으면 생각이 쉽게 데굴데굴 굴러떨어진다. 열등감인가. 무튼 가까운 대면관계의 개인들을 추상적인 속성으로 환원시켜 대할 바에 그냥 타인에게 관심을 끄는게 낫다, 싶기도. 이래서 내가 친구가 없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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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이별의 순간엔 미안한 것들만 떠오를까. 그 앞에서 부끄러울만한 짓을 했던 것만 떠오를까.
편지에 솔직하게 다 담지 못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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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 주간일기를 다 써놓고 티스토리 에러로 날려버렸는데, 몇 가지 남겨두고 싶은 것들, 나중에 봤을 때 무언가를 떠올릴 단서들은 만들어두고 싶어 짧게 기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