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따금 일기/별책 부록이 진짜

[계절성 음주주의보] 꿉꿉한 여름날에는.

momorae 2023. 6. 26. 22:15

계절성음주주의보 #1. 첫번째 이야기
 
 
술을 고르는 기준, 술을 추천하는 글에 대한 제안을 받은 순간 두근거렸지만 당황했다. 맛있는 술을 만나는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 수 있는 글을 써야할 것 같은데, 그 많은 것들이 아직 새롭고 그만큼 고심하며 하나하나 고르고 맛보며 내 호불호를 탐색하고 기준을 마련해나갔던 시절은 너무 오래 전이고, 이제 몸이 고르고 있던 지 오래였기때문이다 (물론 여전히 세상에 먹어보지 못한 술은 많고, 진짜 애주가와 미식가들이 있으므로 이렇게 말하기 무척 부끄럽긴하다). 작년에도 어느 모임에 들고갈 맥주를 고르면서 단골 바틀샵 사장님과 한참을 논의했지만 “이게… 초심자들이 먹기에 많이 시고 쿰쿰했던가요?(람빅)”, “이게… 도수가 높고 술맛이 세게 느껴졌었나요?(고도수 트라피스트)”, “모모래씨, 저도 이제 이게 너무 당연해서 그 감이 정말 안와요…”, “저두요…” 라며 주마등처럼 나의 음주역사를 돌이켜보게될 뿐이었다.
 
그럼에도 아예 아무것도 못 쓰고 싶지는 않았기에, 또 정말 사랑했던/사랑하는 술에 대해 약간의 절주를 최근 결심했기에, 또 이따금 찾아오는 술럼프(@shinhh 님의 표현에 따르면 ‘술이 마시고 싶은데 먹고 싶은 술이 없는 상태’)때 스스로 찾아보기 위해서, **<계절성음주주의보>**라는 이름으로 틈틈히 맛있었던 술에 대해 기록해놓으려한다. 심지어 맛있는 술은 대부분 먹고 취해고 멋진밤을 보냈기에 그 기록이 없다. 이제라도.
 
모든 상황과 주종을 아우르는 기준이나 BEST 맛있었던 술을 꼽기는 막막했는데, 황홀했던 술에 대한 대부분의 기억은 “언제 먹었던 술”로서 “언제”와 엮여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첫번째로 요새, 이 여름날에 맛있는 술부터 적어보려 한다.
 
‘여름의 술’이라고 한다면, 더울 때 먹는 시원한 술의 이미지가 먼저 떠오를 것이다. 하지만 나에게 여름의 술이란 덥거나 시원하다는 온도의 문제이기보다 습도와 더 밀접하다. 일본 애니메이션에 나올법한 하얀 구름과 파란 하늘이 쾌청하고 그늘에 들어가면 가끔 부는 바람이 팔에 기분좋게 닿는 여름날에 맛있는 술이 있는가 한편, 끈적이고 꿉꿉한 습도 높은 더위에 생각나는 술이 있다. 아예 비가 내리는 장마철에 기울이고 싶은 술도 있다. 나는 후자, 습도가 높은 날에 더더욱 한 잔이 당기는데, 좋은 여름술이란 냉방의 기능보단 제습의 기능이 우선인 것이 아닐까 싶다.
 
습도를 낮추는 여름술로는 이런 것들이 있다. (순서는 무작위. 좋아하는 정도와 무관합니다.)
 
🔷 하나. 화이트포트와인으로 만든 하이볼
포트와인은 포르투갈의 포르투에서 생산되는 달고 센 와인이다. 영국까지 운송되는 기간을 버티기 위해 브랜디를 넣어 도수를 높였다. 그렇지만 도수가 믿기지 않을만큼 달다. 보통은 자주빛의 와인을 조금씩 따라 디저트처럼 마지막 잔으로, 입가심용으로 마시지만, 여름엔 화이트포트와인 한 병을 사서 토닉워터, 또는 탄산수와 레몬 조각, 얼음을 넣고 하이볼로 마신다. 눅진한 단맛이 시원하게 풀어져서 아주 좋은 음료가 된다. 화이트포트 하이볼은 안국역의 멋진 여성 대표님(들)이 운영하는 ‘라꾸쁘’에서 처음 마셨는데, 이것은 매일의 여름휴가 같은 맛이다 - 라고 생각했고, 그 뒤로 화이트포트 한 병은 매해 여름나기 준비물이다. 참고로 그 때 만들어주셨던 하이볼은 TAYLOR’s Chip Dry Port 를 베이스로 한다.
 
🔷 둘. 새콤하고 짭조름한 고제(Gose) 맥주
그냥 무더운 날엔 시원한 라거 맥주나 또는 홉을 잔뜩 넣었지만 달지 않은 IPA을 벌컥벌컥 마시는 것도 좋지만, 습한 날일수록 새콤한 맥주를 찾게된다. 습도가 높은 날엔 아무리 잘 만든 람빅이나 괴즈여도 혀 끝에 남는 과일 단 맛이 내 몸에 하나의 끈적임을 더하는 것 같아 꺼려질 때, 고제의 소금맛은 오히려 먹고 난 뒤 혀를 계속 굴리게 된다. 고제는 독일 라이프치히와 고슬라 지역에서 만들어지고, 젖산발효로 인해 새콤하고 암염을 지나 흐르는 물을 사용해 약간의 짠 맛이 있다고 한다. 사실 호불호가 꽤 갈리는 술이라고 하는데, 나에겐 늘 입맛을 되찾아주는 술이다. 무더위로 만사가 귀찮을 때 천천히 고제를 한모금 마시면 입맛을 다시게 된다. 멕시코에서 데낄라와 소금을 함께 먹는 것처럼, 무더움과 짠 맛은 서로 연관이 있는게 아닐지. 한편 신혼여행에서 라이프치히에서 이 고제 맥주 양조장을 갔었는데(Bayerischer Bahnhof Gasthaus) 가는 길까지 그늘하나 없던 땡볕을 지나 양조장 뒷편의 야외 테이블에서 생맥주를 마셨을 때의 그 쾌적함을 잊을 수 없다. 귀여운 독일 할머니들과 테이블을 함께 썼는데, 각자 혀 끝을 굴려보며 선선함을 느끼던 표정도 잊을 수 없다.
 
🔷 셋. 한영석 청명주
최근에 처음 먹어보고 앞으로 모든 여름엔 최소 두 병씩은 먹어야겠다 다짐한 여름술이 있다. 정읍의 한영석 대표님이 만든 청명주라는 약주이다. 청명주를 검색하면 충청도의 다른 명인이 담은 투명한 병에 담긴 노란 빛의 청명주가 나오는데, 내가 마신 것은 짙은 갈색병에 담긴 것이다. 찹쌀로 빚는 청명주는 24절기 중 4월 청명에 담가 먹었던 술이라고 한다. 메뉴판에도 아직 적기도 전우로 막 입고된 청명주를 신나게 권해주시며 사장님은 ‘조선후기의 성호사설이라는 책에서 “가장 좋아하는 술”이라고 구구절절 적었다고 해요.’라고 설명해주셨는데, 먹자마자 나도 그 옛날 조선시대의 선비가 되고 싶었다. 계곡물이 시원하게 흐르는 정자에 앉아 대낮부터 이런 술을 홀짝이며 (성호사설을 쓰신 이익 선생님이 그랬다는 것은 아닙니다) 한들거릴 수 있는 조상님들이 마음 깊숙이부터 강렬히 부러워졌다. 조선시대에 아녀자들은 이런 술을 못 먹었으려나, 그럼 지금 태어난 게 다행인가, 라는 생각을 하기도했다. 흐르는 자연에 발끝을 담근 것처럼 오소소 등골이 시원해졌다.
쓰고보니 근래 쓴 글 중 가장 꾸밈없이 날 것 그대로의 애정을 담은 것 같다. 절주를 결심한만큼 평일 저녁인 오늘은 냉수를 들이키고 있지만, 이렇게 찬찬히 좋아하는 술들에 대해 적고 있으니 마신 것처럼 쾌적하고 산뜻하고 시원하다. 사실 요새는 앞으로 나에게, 인류에게 몇 번의 여름이 남았을지 모른겠다는 생각을 종종한다. 아마 언젠가의 여름에는 분명 이것들이 그리워지겠지. 우선 올해는 최선을 다해, 창을 좀 열어두고 한모금, ‘어른의 행복이다’하는 여름밤을 보내보자.
 
2022.0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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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 Leipzig, Germany, 2018.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