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 프리다

너무 좋아하는 사람들과 보았다. 일찍 퇴근하여 극을 보러가기까지, 그 전 식사와, 보고나서의 대화까지 모든 것이 선물같은 날이었다. 임파워링되는 극이라고 하였으나 그냥 그 날 하루 자체가 나에겐 새로운 힘과 에너지의 원천.
뮤지컬 <프리다>는 프리다가 죽기 직전에 자신의 삶을 돌아보는 토크쇼의 형식으로 그녀의 삶을 재구성한다. 처음엔 왜 이런 인위적인 형식을 취했을까, 그래서 더 대중적이지 못할 수도 있지 않았나 싶었는데, 보는 동안 "아 정말 프리다를 사랑하고 존중하는 사람이 고민 끝에 만든 형식이구나" 싶었다. 그 자체로도 너무 극적이고, 만들지 않고 못 배길만한 프리다의 삶. 프리다의 기구하고 굽이굽이 사건이 많은 생애. 아무리 건조하고 침착한 전기 형태를 취했어도, 아무리 불행 포르노가 되지 않도록 노력해도 보는 이로부터 동정을 불러일으킬 수 밖에 없으며, 누군가의 불행한 삶을 대상화하여 '살아있는 것의 소중함' 정도의 교훈을 얻어가는 식의 소비를 막기 어려울 주제. 그런데 토크쇼라는 형식을 취함으로서 프리다 자신에게 자신의 삶을 재해석할 마이크를 쥐어줄 수 있었다. 프리다 자신이 만든 극은 아니지만, 누군가의 생애 내러티브를 누가 어떻게 구성할 것인가 - 내러티브의 화자에 대한 고민을 많이 했기에 나올 수 있는 극이라고 생각했다. 그녀를 정말 존중하는 극.
그런 존중은 두 번의 무용이 잘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아이를 잃은 프리다가 울다가 추는 춤, 그리고 마지막에 떨어지는 꽃잎 사이에서 홀로 추는 춤.
예전에 들었던 수업의 교수님이 교수님 학창시절 당시 학교에서 열린 추모제에서 살풀이굿과 관련하여 춤을 춘 적있다고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그 때 엄청난 비극에 대한 추모, 해소의 수단으로서 사람이 춤을 출 수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던 것 같다. 만국 공통의 언어로 음악이 흔히 말해지지만, 춤 역시 개인에게서 공동으로 - 언어를 가로질러 - 감정을 공유하고, 함께 감정을 털고 승화시키는 수단이지 않을까. 이번 프리다의 춤을 보면서 그런 생각을 했다. 그리고 특히 이런 파트를 춤으로 표현해낸 것 역시 이 극이 프리다에 대해 얼마나 존중하는지, 함부로 소비하지 않으려 애썼는지의 증명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꿈꾼 혁명
무엇으로부터 혁명이었나
멕시코의 진정한 자유를 위한
남자, 여자, 인종과 상관없이,
어떤 언어를 쓰느냐에 상관없이
모든 인간은 존엄하다는 인식을 위해
불평등한 모든 것들을 위해 일어나 투쟁하라
내 검은 목발이 아니라 붓이었어
삶에 의해 살해당하더라고 난 오늘을 버텨
내일을 꿈꿀 거야
욕조 속을 떠다니는 실낱같은 생명
예수는 십자가를 짊어지고
프리다는 육체라는 무거운 껍데기를 짊어지고
남자는 여자 위에 있다는
아직도 계급이 남아있다는
잔인하고 우스운 세상 위해서
프리다 자체 폭발해라
나는 폭발이고
나는 혁명이다
정말 천천히 젖어들며 마지막엔 가슴이 벅차 터질 것 같은 극이었다. '왜 그렇게까지 살아야만 할까' 라는 생각이 들게 하는 생애이며, 매번 데스티노(죽음/운명)이 '차라리 죽자'라고 유혹하지만 사실 잘 들어보면 자꾸만 살라고, 죽음에게 저항하라는 운명의 속삭임을 들어온 여자. 죽음을 앞둔 토크쇼에선 '이 자리를 얼마나 기다렸는지 모른다'라고 반복하여 말하는 여자. 생을 사랑한만큼 사람을, 혁명을 사랑했으며, 그 동지로서 한낱 개별 인간인 '디에고'를 끝까지 끌어안은 여자. 으허헝 울지 않을 수 없다.
벅차서 집에 돌아오는 길에 일단 OP 2열이 있는 좌석을 냉큼 잡아두긴했는데, 돈이 없다.. 봐서 취소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