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산인 여행] 겨울밤여행 02
아침 일찍 일어나 어제 오르지 않은 요나고 성터에 올랐다. 어제 밤엔 까마귀가 우는 스산하고 침침한 곳이었는데, 맑은 아침에 보니 정겨운 동네 뒷산. 오르는 길에 가볍게 입은 동네 사람들 - 나이 지긋한 부부 또는 혼자 오르는 2030대의 여성 또는 학생 - 과 으레 모든 나라의 뒷산에서 그러하듯 "오하요" 하고 가볍게 인사를 나누며 교차했다. 언젠가부터 짝궁과 국내외 여행에서 성터를 자주 찾는데, 어떤 유적지나 관광지의 모양새가 아니라 허물없는 뒷산으로서 동네와 일상에 녹아있는 성터는 새로웠고, 그게 꽤 푸근하고 좋은 느낌이었다.
산에 있는 성은 시야가 좋기 마련. 모든 방향에서의 다가옴을 관찰할 수 있는 곳. 가장 높은 곳의 탁 트인 곳에 서니, 산과 마을과 해안이 모두 잘 보여 지루할 틈 없이 몸을 돌려 볼 것이 많았다. 어느새 해가 바로 떠서 다들 아침을, 하루를 시작했구나 싶었다. 이 때의 차갑고 맑고 건강했던 아침 기억이 지금도 꽤 좋다. 다음날에도 올라오기로 약속했지만, 극심한 숙취로 한 번 더 올라가지 못했다.














카페 큐나인에서 모닝세트를 먹고, 역 근처의 ORIX 렌트카에서 차를 빌렸다. 작년(24년) 유난히 한국에서 단풍을 못 본 것 같은데, 뒤늦게 이곳에서 노란 은행나무들을 보았다.


운전을 많이 한 여행이었다. 갈 곳, 가야할 곳만 명확하게 정해놓고, 사실 경로를 자세히 알아보진 않았었다. 막상 출발할 때가 되어 검색해보니 최소 한시간 반씩은 운전을 해야했더랬다. 오늘은 서쪽으로, 내일은 동쪽으로. 편도 한시간 반이니 왕복으론 최소 하루 세시간. 한국이었다면 하루는 원주를 당일치기로, 하루는 대전을 당일치기로 다녀온 셈이니 우리 성향치고 꽤나 빡세게 다닌 셈이었다. 더욱이 운전방향이 반대의 초행길. 낯선 길이며, 도시가 아닌 시골의 도로. 또한 도로 상태가 좋지 않아 운전하며 깜짝깜짝 놀랐다. 포장이 깨져있거나 중간중간 움푹 패인 곳들이 많았다. 한편 겨울철이라 해가 빨리 지는 것도 미처 예상하지 못했던 점이다. 도시와 달리 해가 지면 꽤나 깜깜하고, 식당도 빨리 닫아 꽤나 서두르며 다녔다. 여유롭고 한적한데 분주한 느낌?! 물론 즐겁게 다녔고, 오랜만에 긴 시간동안 (한국처럼 노래를 틀 수도 없으니) 핸드폰 없이 나란히 멀리보며 두런두런할 수 있어 좋은 여행이었다. 다만 누군가 혹 이 글을 보고 여행 계획을 짠다면 참고할 수 있도록 적어둔다. 렌트를 추천하나 생각보다 운전으로 인한 피로가 많이 쌓일 수 있습니다.
언젠가 한국에서 시골살이의 이동권에 대한 몇 개의 글을 본 적 있다. 도농격차 등등 큰 문제의 골격은 여기도 다르지 않은지, 자차가 없으면 안되는 생활권인가싶게 많은 가게들(카페, 식당, 편의점)엔 항상 넓직한 주차장이 있었고, 여행하는동안 걷거나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들보다 자동차를 많이 봤다. 버스의 배차간격들은 생각보다 띄엄띄엄이었다. 일본에서의 운전 경험이 많지는 않지만 그간엔 경차와 소형차를 많이 봤는데, 중대형 차량이나 픽업트럭, 그리고 거친 운전도 많이 보았다.
무튼 오늘은 시마네현 오다시쪽으로. 다이센산을 등 뒤로 하고 달렸다. 외곽으로 나가는 차선과 램프 구역이 꽤 복잡해서 네비게이션에서 "여기서부터 한동안은 길을 따라가십시오." 라는 안내가 나왔을 때 짝궁과 함께 가슴을 쓸어내리며 서로 축하했다. 중간에 길을 잘못 들었는데, 엊그제 개통됐나 싶은 새 도로를 타게 되었다. 차량 네비게이션에도 등록되지 않은 도로라 우리 위치를 나타내는 화살표가 산 위를 달리고 있었다. 도로의 고도가 꽤 높아 속도를 내고 언뜻 도로 밖을 보면 살짝 간지러운 느낌으로 무서웠다.



그렇게 '니마 모래 박물관'에 도착했다.

니마 모래 박물관엔 1년짜리 모래시계가 있다. 물론 한국 정동진에도 1년짜리 모래시계가 있다. 그리고 사실 이 박물관엔 그게 볼 게 전부다. 한 층 아래로 내려가면 근처 해변의 서로 다른 모래와 모래로 할 수 있는 어린이용 체험공간이 있다 (풀칠한 종이에 색색의 모래 붙이기 등). 만화 <모래시계>가 아니었으면 살면서 몰랐을 곳이자, 굳이 오지 않았을 곳. 그렇게 <모래시계>를 좋아했느냐, 하면 나의 최애 만화책은 아니다. 고작 서너번쯤 다시 보았고, 소장하고 있지도 않으며, 한동안 오래 잊었었다. 하지만 마음이 많이 약해진 사람에게 '힘내'라고 말하는 건 큰 일 날 수 있다는 것을 아마 이 책에서 처음 배웠던 것 같고, 음, 어린 나에게 여러모로 인상 깊은 만화였던 건 같다. 아마 처음 착각한 듯 '니마 모래 박물관'과 '돗토리 사구 모래 미술관'이 같은 곳이었다면 막상 또 굳이 안 왔을 수도 있는데, 서로 다른 곳인걸 알자 오기로(?) 더 오게 된 곳. 무튼 그런데 박물관 자체는 정말 뭐가 없긴 하다.
만화 <모래시계>에 대한 공간이 한 켠에 꾸려져 있었다. 드라마화도 되었었군. 아마 드라마의 주제곡이었을 노래가 잔잔하게 반복재생되고 있었고, 만화와 드라마에 대한 포스터, 만화책 원화 몇 종 등이 있었다. 정말 많은 사람들이 다녀갔구나 싶은 두꺼운 방명록들도 쌓여있었다. 진짜 꽤 사랑받았었나보다. 짧은 일어로 남들이 적어두고 간 것을 보자니, 어쩐지 만화에 대한 기념공간이 아니라, 아시하라 히나코 작가에 대한 추모공간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발길이 쉽게 떨어지지 않아서 좁은 공간을 여러번 맴돌다 나왔다. <모래시계>나 <피스>, <브레드앤버터>와 몇 개의 단편 정도를 봤을 뿐이다. 대체로 위태로운 인물들이 나오고, 만화다운(?) 극단적인 상황들이 있긴하나, 그래도 늘,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해 존중하는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위태로운 사람들은 이미 앞서 떠나보낸 가까운 이가 있고 (사실상 넓은 범위의 자살 유가족이다), 그 죽음을 재해석하며 자라거나 늙는다. 고통스럽지만 살아가기 때문에 죽음을 재해석할 계기도 생긴다. 남겨진 사람에 대해 들여다보고, 다음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믿는 작가라는 인상이었기에, 그 스스로가 목숨을 끊었다는 뉴스를 접하고, 그가 마지막에 놓여있던 갈등에 대해 번역기를 돌려가며 서툴게 접했을 때, 이해가 안되는 건 아니지만 동시에 정말 속이 상했다.
푸른색 모래를 담은 3분짜리 모래시계 하나를 샀다.






계획했던 다음 목적지는 '산베 아즈키하라 매몰림 공원'이었으나 출발 직전에 이번주가 연에 한 번 있는 정비휴관기간(12월 첫째주)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여행을... 11월 마지막주에서 12월 첫째주로 미루며 미처 챙기질 못했다. 4천년 전, 화산이 폭발하면서 그대로 묻혀버린 거대한 고목을 볼 수 있는 곳으로, 이번 여행을 계획하며 처음 알게된 곳이지만, 사진을 보며 꽤나 매혹되었던 곳이라 진짜 통.탄.하였다. 으허. 낯선 곳에 여행을 오면 현실적인 감각으로 내가 이곳에 선뜻 다시 올 것 같은지 셈하게 된다. 요나고에 다시 올까, 이 오다시까지 운전해서 과연 올까 싶은 솔직한 내 마음을 알았기에 가슴을 텅텅 치며 아쉬워할 수 밖에.

'이와미 은광'에 가보기로 하였다. 그렇게 멀진 않았는데 꽤 굽이굽이 산 속을 들어가는 느낌이었다. 실제 갱도에 가보고 싶었으나 주차장에서 갱도까지 걸어서 40분 정도 걸리며, 마침 셔틀도 놓쳤기에 포기했다. (이미 산 속은 해가 한 풀 꺾여 고요하고 차가웠다.) 근처의 '이와미 은광 세계유산센터'에 가보기로 했다. 이와미은광은 2007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정말 정말 외진 곳의 박물관이었음에도 내부 콘텐츠들이 모두 영문화되어있었다 (앞에 여는 글만 되어있는게 아니라...) 17세기 전세계 은 생산의 1/3을 차지했다고. 기억에 남는 건 조선의 기술자들이 전파했다던 연은분리법에 대한 설명. 30kg짜리 은괴를 직접 들어볼 수 있었던 것. 은광을 중심으로 형성되고, 확장되던 마을의 경계. 주거지의 모습. 얼마전 '세계테마기행'에서 볼리비아 포토시 은광에 대한 영상을 봤었는데, 그 때 본 현대의 은광(누가 은광에서 일하는가)을 한 켠에 떠올리며 보게 되었다.




마땅히 문 연 식당이 없어 편의점에서 삼각김밥과 오뎅을 사서 차 안에서 늦은 점심을 먹었다. 오뎅철의 일본이 너무 오랜만이라 일정 내내 편의점 오뎅을 열심히 먹고 다녔다. 별 거 안 했는데 돌아가면 해질녁이라 서둘러 이즈모의 히노미사키 등대로.
히노미사키 등대에 올라가려면 4시 30분 전에 도착했어야하는데, 역시 등대는 호락호락한 곳에 있지 않고, 파도든 사람이든 올 테면 와보라며 맞부딪힐 수 없는 곳에 있지. 곶을 따라 올라가는 마지막 절벽의 도로가 꽤나 구불구불하여 속도를 낼 수 없었고, 지는 해를 정면으로 보며 운전하는 짝궁이 꽤 눈부시게 고생했다. 결국 세잎 실패. 해가 빨리 진다. 그만큼 바람이 매섭게 부는 해안절벽을 따라 걸었다. 예전 중학교 과학 시간에 해가 질 때 바다와 해변에서 바람이 부는 방향 같은 거 배우지 않았었나, 그런 거 떠올리며 걸었다.






운전하는 시간이 길었기에 이런 저런 이야기를 많이 나누었다. 운전대를 잡은 짝궁의 "재미있는 이야기 해줘" 요청을 받으면 그냥 요새 나에게 재미있는 것(?)에 대한 아무말을 시작하는 것이었다. 니마 모래 박물관을 나올 땐 짝궁이 "그래서 <모래시계>는 무슨 내용이야?" 라고 물었다. 정말 그냥 내가 오자고 해서 이 벽지까지 몇 시간 운전을 한 것이라니, 세상에. 무튼. "시마네의 깡시골에서 늘 벗어나고 싶었던 여자가 도시에 나가서 살다가 이혼하고 초등학생 딸과 함께 다시 고향에 돌아와. 그 딸이 주인공이고, 친정에 돌아가기 직전에 이 박물관에 들려 모래시계를 보며 일 년이란 시간을 가늠해. 그리고 결국 눈이 펑펑 오던 어느 밤에 이 산골에서 실족사 같은 자살을 해 (라고 말했지만 다시 보니 유서까지 남긴 명백한 자살이었다). 그리고 딸은 외할머니와 이곳에서 살면서 동갑내기 남자애도 만나고, 이웃의 남매도 만나고. 네 명이 얽히고 얽히는 순정만화야."
한 번은 굽은 도로에서 커브를 돌며, 멀리, 아래 해안에 작은 집 몇 개가 있고, 작은 어선 몇 척이 있었다. 그게 꼭 영화 <환상의 빛>에 나오는 집과 집 앞 공터 모습과 똑 닮았다. 검색해보니 <환상의 빛>은 노토 지방에서 찍었다고. 무튼 짝궁이 다시 물었다, "그건 무슨 내용인데?". "좀 옛날 배경이고. 젊은 부부가 있어. 어느날 남편이 집에 돌아오지 않아. 사고인지 자살인지 모르겠지만 남편이 동네 근처 기차 선로에서 죽어. 그리고 여자는 완전 깡시골의 어촌으로 재가를 해. 그 마을이 아까 본 곳과 진짜 닮았어. 오래된 반질반질한 계단에 빛이 들어오는 장면이 진짜 아름다워." 말하면서 어이없어 웃었다. 도대체 내 취향은 왜 이런가, 도대체 내 취향은 무엇인가.
성격이 급하고 매사 답을 얻고 "알아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인 주제에, 왜 영영 '정답'을 들을 수 없는 물음을 품고 살아야하는 이들의 이야기를 좋아하는가.
어느새 어두워진 길을 다시 굽이굽이 내려와, 짝궁이 핀해둔 식당으로 이즈모 소바를 먹으러 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