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산인 여행] 겨울밤여행 01
24년 12월 초 에어서울 요나고 직항을 이용하여 5박 6일의 산인 여행을 다녀왔다. (그렇다, 여행 중간에 계엄이 터졌다.) 주코쿠에서도 동해에 접한 시마네현과 돗토리현을 산인지방이라고 일컫는 것을 처음 알았다. 편의상 산인 여행이라고 적었지만, 돗토리현의 가장 동쪽에서 시마네현의 가장 서쪽까지 300km가 넘는데다가 나는 내륙쪽으로도 깊이 들어가지 않았기 때문에 사실 산인의 아주 적은 부분, 말그래도 동해와 맞닿아 있는 겉부분을 겉핥기한 셈이다.
요나고 시내의 호텔과 가이케 온천 지구 내 온천호텔에 각각 2박, 3박을 묵으며 렌트카를 타고 돌아다녔다.
연말까지 써야하는 휴가가 있었으나, 몸도 마음이 꽤나 지쳤던 상황이기도 하고, 선뜻 여행에 돈을 쓰기에 마땅한 사정도 아니었던터라 여행을 결심하기까지 꽤 망설였다 (그 증거로 산인 여행 정리 폴더의 이름은 '가게될까 돗토리' 이다). 다만 그만큼 어딘가 훌쩍 도망가고 싶은 기분이었었다. 그 때 짝궁이 "가자"라며 손을 끌어주었다. 시코쿠의 어딘가와 잠시 고민했던 것 같기도한데, "한 번은 다녀와야지" 싶어 결국 요나고로 결정했다. 십 몇 년 전, 요나고 직항이 없었을 때 함께 돗토리 여행을 알아보며 왕복 교통비를 셈하며 함께 머리를 싸맸던 광화문 어드메의 카페를 여전히 기억한다. 만화 <허니와 클로버>의 돗토리 모래 사구, 그리고 만화 <모래시계>의 니마 모래 박물관 때문에 돗토리에 꼭 가보고 싶었으나, 당시엔 배를 타고 사카이미나토항으로 가거나 또는 일본의 다른 지방으로 가서 버스를 타야했다. 학생에겐 턱 없는 금전적 비용이기도 했고, 알바를 그렇게 오래 뺄 수도 없어 포기했지만, 사실 직장인이 되어 월급과 휴가가 생겼을 때 요나고 직항 소식을 들었어도 한달음에 달려갈 마음은 선뜻 생기지 않았다. 갈 수 없던 그 때 더 간절하고 더 가고싶었던 것 같다.
하나 더. 나는 돗토리 모래 사구 쪽에 있다는 모래 박물관이 <모래시계>에 나오는 니마 모래 박물관인 줄 알았다. 자세히 알아보지 않았고 그저 반가운 마음에 냅다 같은 거라 생각했던 것이다. 정확하게 전자는 돗토리 모래 사구 미술관이며 돗토리현에 있고, 니마 모래 박물관은 시마네현의 오다시에 있다. 둘 간의 거리는 약 200km. 당시엔 운전면허도 없었으니, 가서 막상 그게 그게 아니라는 걸 알았어도 니마 모래 박물관에 갈 뾰족한 방법은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이번 여행의 목표는 '돗토리사구', '니마모래박물관', 그리고 검색하다 홀린 '매몰림공원'. 숙원사업을 하듯 "드디어" "정말" "진짜 한번은"이라는 마음으로 출발했다.
돗토리현과 시마네현은 일본에서 인구수가 가장 작고, 그다음으로 작은 현. 차가운 날씨 때문인지 도착한 요나고 공항은 약간 스산했고, 공항에서 시내로 들어가는 열차는 무려 단선, 한 시간의 한 대 꼴인 무려 2량 열차.
겨울엔 해가 빨리 진다. 도시가 아닌 곳엔 밤이 더 빨리 찾아온다. 흐린 겨울은 춥다. 그걸 도착해서 알았다. 싫었다는 건 아니고, 잠시 당황했다가 금방 익숙해졌다. 아빠의 직업 상 우리 가족이 드물게 가족 여행을 한다면 항상 겨울의 동해였는데, 전반적으로 그 때와 비슷한 톤의 여행이었다. 금방 어두워지며, 까맣게 어두워지는 낯선 시골 도로를 나와 짝궁이 직접 운전하자니, 그 때의 아빠와 엄마는 나와 동생을 뒷좌석에 싣고 행여 마음이 급하진 않았는지 이따금 떠올리는 정도.
요나고 시내에 도착하여 호텔에 체크인을 하니 어느새 저녁 5시였고 이미 해가 지고 없었다. 호텔 뒤편에 있는 요나고성터에 올라가려다 제법 어두운 산길 입구에서 갑자기 겁이 나 내일 오르기로 하였다. 저녁을 먹으러 시내를 걷는데, 어마어마한 까마기떼에 당황했고, 거리에 사람이 하나도 없어서 또 당황했다. 사람은 없지만 라이트를 켜고 쌩쌩 달리는 차들 옆을 걸으며 "이번 여행의 장르... 뭔데?" 하며 짝궁과 큰소리로 와하하하며 걸었다.
저녁은 요나고의 닭요리 전문점 산뽀우(さんぽう). 꽤 유명한 동네 맛집인 듯하였는데, 우리는 닭고기키마카레와 닭고기밥. 양이 꽤 많았고, 동네 맛집이 그러하듯 '오 이걸 먹고 자란 사람은 한 번씩 이게 생각 나겠구나' 싶은 적당한 슴슴함과 적당한 짭쪼롬. 몇 안 되는 테이블이 거의 예약되어있었는데, 닭전골음식을 먹는 듯 했다. 이후 여행 내내 마주치는 현지인들은 '도대체 무슨 연유로 이 작고 외진 곳에 오게 되었는지' 궁금하고 신기하다는 표정으로 물어왔는데, 이어지는 질문으로 "그럼 어디어디 가봤니"라고 할 때 "산뽀우에 다녀왔어"라고 말하면 모두 다 "아 거기~" 하며 알았다.
먹고나오니 정말 깜깜해졌고, 그마저의 자동차 소음도 사라져 한결 더 조용해졌다. 이런 도시에 있다는 벨지안 맥주 전문점으로 걸었다. 골목마다 걸음소리가 울릴 것 같아 조심조심하며 조용조용 설레고, 조용조용 우리끼리 깔깔거렸다. 그리고 요나고 여행의 운명의 맥주집 도착.
일본에서 맥주를 마시면, 그들의 로컬 양조장 맥주도 물론 흥미롭지만, 한국에 들어오지 않는 맥주들 - 같은 양조장이라도 다른 맥주가 들어온다 - 을 만나는 재미가 더 크다. 작고 밝은 스탠딩바에, 단골이 있는 바. 나라도 내가 자주 가는 술집에 낯선 외국인들이 와서 호불호가 갈리는 술을 맛보고 있으면 무척 궁금하고 뭐라도 한 잔 사주고 싶을 듯. 우리는 분위기와 바틀 냉장고를 두리번거리며, 단골분들은 우리가 고르고 마시는 술들을 지켜보다가 한 두마디 서로 건네기 시작하고, 어느새 즐거워졌다. 이거 맛있네요, 이쪽이 더 제 취향입니다, 오 그게 입에 맞나요? 저도 좋아합니다, 그럼 다음에 저것도 드셔보세요, 평소에도 벨지안 맥주를 좋아하나요? 한국에서는 이런 스타일이 인기가 많습니까? 일본에서는 이런 스타일이 주류인가요? 설마요, 하하, 저희는 호불호의 호를 담당합니다, 그런데 어쩌다 요나고에 오게 되셨습니까? - 그런 걸 각자의 혈중알콜농도에 기대어 반갑게 주고받았다. 저희 내일도 올게요.
돌아오는 길엔 하늘을 올려다보며 평소 보았던 것과 높낮이가 살짝 다른 별자리들을 이어보기도 했다.
체감상 최소 밤 11시에 가까운 조용함이었는데 8시가 조금 안 된 시간이었다. 이온몰 마트의 이런저런 상품과 진열을 구경하다가 떨이 초밥과 우엉튀김, 캔맥주를 집어와 호텔에서 약간은 얼떨떨한 ~ 드디어 왔구나, 정말 왔구나, 너무 사람이 없는데 ~ 여행 첫 날을 기념했다.
그리고 둘째날, 여행 치고 조금 이른 시간인 6시30분에 일어나 차가운 창문에 코와 이마를 대고 멀지만 큰 산 뒤로 해가 뜨는 것을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