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5.01
비가 쏟아지고 어둑해서 느지막히 일어났다. 밀린 빨래를 돌려놓고, 만리포 작가님의 단행본 <돈덴>의 마지막에 수록된 이자혜 작가님과의 대담을 마저 읽었다. 우연히 SNS에서 만리포 작가님의 단편만화 <돈덴>을 처음 봤을 때의 충격이랄까, 얼빠짐을 생생히 기억한다. 정말 좋았는데, 작가님의 첫 단행본의 발간이라니. 수록작은 '돈덴'과 '13살의 공산주의'. 다시 본 '돈덴'은 역시 좋았고, '13살의 공산주의'는 좀 더 좋았다. 그리고 각 수록작마다의 작가님의 후기 글이 진짜 너무 좋았는데, '13살의 공산주의' 에필로그글을 모든 문단이 좋아서 와작와작 꼭꼭 씹어 삼키고 싶었다.
전문을 필사하여 옮기고 싶지만 그럴 수는 없으니, 정말 일부만 가져와본다면.
반자본주의적 톤을 가진 작품들이 점점 늘어나는 것 같다. 양육강식의 씨름판을 전제하고 진행되는 쇼, 노동 소외를 다루는 드라마. 자본주의의 태생적 한계는 비밀이 아니고 대자본 미디어에 의해 오락회되어 공공연하게 선전된다. 구조의 수혜자들이 귀띔하는 구조적 한계는 구조의 투명성을 담보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구조적 한계는 점점 인간 집단의 필연적 한계처럼 생각된다.
왜 너를 사랑하기를 관두지 못할까? ... (중략) ... 그러나 적어도 네게 쏟는 마음에 내 인간성을 빚지고 있다고 느낀다.
채식주의자로서 나는 폐를 끼친다. 비건도 아니고 생선, 우유를 그런대로 먹는데도 그렇다. 지금이야 마트 매대에 채식 코너가 따로 있기도 하지만 내가 채식을 시작했을 때쯤에는 고기 안 먹는다고 하면 사람들이 적대적인 반응을 보였다. 가축을 수단으로 대하기로 결정한 사회이기 때문에 채식은 일종의 월권 행위로 받아들여지고, 정치적 의사 표현을 일상 차원에서 하는 것은 사회에 어리광을 부리는 듯한, 미복무하는 듯한 인상을 준다. 학교에까지, 일터에까지 '개인 사정'이나 끌고 다니는 사람. 사람은 원래 다 사정이 있고 다 경시되고 있으므로 네 것도 경시되어야 공평하다는 식이다. 사회에 참여하면 참여할수록 사회에 어리광을 부리는 것으로 여겨진다. 아무데서나 자기 자신으로 있으려고 하는 미숙한 구성원으로 여겨지는 한편, 부자연스러운 윤리적 실천을 밀어붙여 인간의 자유를 제한하려는 사람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나는 점점 더 자주 판단을 유보하며, 속물적으로 변해가고 있다. 하지만 정치적 입장의 원형적 버전으로서 인간성을 연마해나가고 싶다는 마음은 변함없다.
"아무데서나 자기 자신으로 있으려고 하는 미숙한 구성원"의 강조 처리는 내가 한 것이다. 자기 자신으로 있으려고 하는 타인의 울부짖음과 몸서리침에 결코 좋은 시선을 보내고 있지 못하며 꽤나 괴로워하는 나 스스로이기에 글자가 눈에 밟혔다. 하지만 나 역시 늘 생각한다. 너도, 나도 스스로에게 가장 편안한 것, 마음을 거스르는 것 없이 자연스럽게 살고 싶은 것인데. 우리 자신이 되고 싶은 것인데.
다음 부분을 읽으면서도 절절했었다.
미 대선이 끝난 후에 공산당 사람 셋이 해리스나 트럼프나 대자본의 하수인이라 둘은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고 말했는데, 나는 트럼프의 당선으로 인해 인생이 굴러떨어지게 될 사람들이 좌표상 나와 더 가깝다고 느꼈으므로 화가 났다. 미국 RCA(Revolutionary Communists of America) 홈페이지를 들어가보면 '덜 나쁜 쪽'을 고르지 않는 뚝심이 필요하다, 진정한 공산주의는 민주당이나 공화당을 고르지 않는다는 선언이 있다. 하지만 최선의 선택을 하는 과정에서 굴러떨어지는 사람들은? 덜 나쁜 쪽을 계속 골라나가다보면 가장 이상적인 상태에 도달할 수 있게 되는 게 아닌가? 덜 나쁜 쪽을 고르는 과정에서 말 그대로 목숨을 잃는 사람들. 적은 머릿수에 머리 하나는 더하는 것으로 '지지의사'를 표현하는 일은 얼마만의킈 변화를 가져오나. 얼마만큼의 변화가 충분한 변화인가.
몇 번 없던 투표이지만, 대한민국 시민으로서 투표권을 행사할 때, 민주당보다 다른 소수 정당, 원외 정당에 표를 던졌었다. 계엄 이후 나는 이제 이재명이 대통령이 되길 정말 확고하게 너무나 진심으로 바라며(물론 20대 대선 때도 바라긴했다), 조금이라도 가까운 사람들과 만날 땐 이재명을 뽑아야한다, 서로 진심과 농담을 곁들여 아무렇지 않게 이야기한다. 그러면서 동시에 유보하게 되는, "나중에"에 동조하며 외면하는 것에 대해, 앞서는 것의 그늘 속에 있는 존재에 대해 인지한다.
지난 몇 개월 광장에 나가면서 퀴어, 비정규직, 이주노동자, 장애인 등 나중이 있을 수 없는 존재들이 분명 있으며, 내가 차악을 선택하는 과정에서 누군가의 삶 굴러떨어지게되며 죽는다는 것을 더 여실히 알 수 밖에 없었기에. 내가 이재명과 민주당을 지지할 수 있는 것은, 수도권 화이트컬러 정규직 헤테로 기혼 여성이기에, 그가 손를 내저으며 다음이라 말할 때 내 일 아닌 그 다음을 기다릴 수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동시에 나의 퀴어 친구들, 비정규직 친구들의 얼굴을 떠올렸다. 내가 그들 얼굴 앞에서 이재명과 민주당을 찍어야한다고 말할 수 있나, 나는 너희를 다음으로 미루는 후보자에게 투표하려한다 말할 수 있나. 하루 멀다하고 장례식에 가고, 기일을 챙기고, 추모를 하는 너희에게. 이게 미안하다고 사과하면 될 일인가.
그런 생각을 하며 늦은 점심을 먹고, 미뤄둔 영어 공부를 하고, 빨래를 널고, 개고, 뉴스를 틀었다. 대법원은 '파기환송' 판결을 내렸다. 며칠 내 타임라인에 시끄럽던 성노동을 하는 퀴어 여성, 아니 그냥 어떤 구체적인 특정 개인에 대한 차별과 혐오, 극악스런 폭력의 글들이 잠시 멈췄다. (욕) 구조에 대해 젠 척 비판하는 게 구체적이며 살아있는 개인을 마음껏 물어뜯어도 되는게 아니라는 걸 진짜 모르냐(욕). 그런건 비판도 아니며, 저항은 구조를 향하는 것이지 특정 개인을 향하는 것이 아니라고. 다같이 눈깔을 뽑거나 전뇌화하고 사는 게 아니라면, 이 사회에서 여성으로 일하고 벌어먹고 살려면, 그게 사무직이든 진짜 룸에 나가든 그게 뭐 얼마나 다른, 서로 분리된 스펙트럼에 있을 것 같냐. 본인의 기분 좋지 않음과 껄끄러움이 뭔 대단한 인사이트라도 된 것 마냥 지랄 좀 하지 말라고, 사람 죽는다고.
숨 쉴 곳이었고, 언어를 익히고, 이론을 배웠던 강의실의 면면을 떠올린다. 거대한 힘의 체제의 연장선에 있던, 결코 자유로울 수 없었던 교수들에 대해 생각한다. '기득권'이라기엔 더욱 거대하고 끈끈한 덩어리. 구조라기엔 대대손손 배불렀던 개개인과 개개인이라기엔 가문과 조직을 넘어선 유구하고 강건한 구조. 저리 티나게 발악을 하며 제 몸을 쥐어짜는게 보인다는 점에서 희망을 가져야하나. 내가 이렇게까지 이를 지지하고 싶진 않았다고.
결코 본의 아니게 내가 서있는 이 지점이 과연 어디인지.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인지. 내년엔 5월 1일이 공식적으로 '노동절'이며, 모든 노동자가 쉬는 날이면 좋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