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봄이 오는 오키나와] 류큐와 나하
시내 쇼핑몰로 렌터카를 반납하였다. 공항 지점에서 차를 빌릴 때 반납 장소 바로 옆에 있는 주유소는 굉장히 비싸니 시간을 넉넉히 두고 꼭 다른 데서 주유하라고 신신당부를 했었는데, 언뜻 지나가면서 보니 기름값 표지도 가려져있었다(무서운 곳). 차를 반납하고 나하의 모노레일, 유이레일을 타러.
슈리성으로. 지난 며칠 들렸던 세 개 성의 권력이 스러지고, 이 섬 위에 새롭게 번영한 류큐왕국의 수도성인가. 서울 광화문의 편평한 수평의 땅에 세워진 경복궁이 아니라, 이처럼 모든 걸 내려다볼 수 있는 높은 곳에 자리잡은 성을 볼 때마다 낯설다. 돌로 지은 성벽인데 곡선이 많았고, 검은 돌과 대조적인 붉은 색이 곳곳에 두드러졌다.
슈리성 안 쪽에 이르러 입장권을 사야했는데 막상 사서 들어가니 가장 메인 건물 주변으로 가림막을 치고 공사중이었다. 잠시 '이럴거면 무료 입장이어야하는거 아냐?'하고 다소 툴툴거렸는데,
가림막을 따라 반 바퀴를 도니 실시간 복원현장을 볼 수 있는 것이 아닌가. 와, 문화재 보수 현장을 관광자원화하다니!!! 대환영, 대존경, 정말 멋진 아이디어였다.
<허니와 클로버>의 다케모토를 통해 문화재를 복원하는 일이라는 걸 처음 의식했던 것 같다. 아, <시간을 달리는 소녀>엔 그림을 복구하는 이모가 나왔지. 지나온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다시 내려오는 일. 그건 생각보다 가슴 뛰는 일이나 먹먹한 일이라는 것을 지난번 불국사에서 석가탑 복원 영상을 보고서야 울컥 알 수 있었다. 별도로 다양한 실제 직업 현장을 보여주는 사회공공적인 시도들엔 늘 든든한 기분으로 지지하게 된다. 그런 단순한 낭만과 얄팍한 가치만으로도 한참 발길이 떨어지지 않는 곳이었는데, 진짜 덕후들은 얼마나 좋은 기회일까. 나중에 짝궁한테 듣기로 연간 입장권 같은 게 있었다고 한다. 가까이 살면 주기적으로 와서 조금씩 천천히, 그러나 꾸준히 분명 진행되고 있는 경과를 보곤 할까.
슈리성 뒤로 나와 돌다다미길을 조금 헤매어 내려왔다.
전날 펍에서 본 맥주 지도에 있었던 슈리성 뒷편 브루어리를 길 건너편에 두었을 때 비가 오기 시작했다.
Wolfbräu. 언젠가부터 수제맥주 씬에서 그렇게 주류가 아니게 된(?) 독일식 맥주를 파는 곳이었고, 실제 독일 분이 사장님이셨다. 사실 이번 오키나와에서 이상하게도 독일인을 많이 만나서 "나 교환학생 다녀온 이후에 가장 독일어를 자주 듣는 시기인 것 같아"라고 짝궁에게 말했었는데, 이날도 주인 내외분이 하는 독일어, 그 밖에 산더미 같은 배낭을 메고 들어와 옆테이블에 앉은 젊은 독일인 여행자들이 나누는 독일어 덕에 이곳이 일본인가 독일인가 싶었다. 무튼 매우 한갓진 기분으로 홀짝 거리며 최진영 작가의 소설을 읽기 시작했다. 소설 역시 훌쩍 제주도로 떠난 이의 이야기라 여행지에서 읽기 좋았다.
해가 뜬 채로 비오는 날 어딘가 부서지는 것 같은 빛과 빗방울을 보며 느긋하게 마셨다. 적당히 일어서 유이레일을 타고 올라왔던만큼 한참 내리막을 걸었다.
걷다보니 출출하여 근처 오키나와 소바집으로 들어갔다. 어쩐지 제대로된 오키나와 소바집은 처음이었는데, 뜨끈하고 맑고 맛있었다! 사실 밀가루면에 돼지고기 육수라고 하여 무겁게 느껴지고 내 취향이 아닐 것 같아 굳이 찾아 먹는 것을 미루고 있었는데, 꽤 든든한 양식이었다.
관광지는 아닌 길을, 퇴근시간이라 꽉 찬 좁은 도로를 끼고 꽤 걸었다.
일부러 시장쪽을 돌았는데, 어둑해지자 시장 골목 곳곳으로 그럴싸한 술집들이 하나둘씩 장사를 시작하고 있었다. 그러고 싶진 않은데, 어제 갔던 테라스는 성수동이요, 이곳은 신당동인가 ㅋㅋ 하는 말이 그냥 나와버렸네.
예전 같으면 그 분위기를 즐기고자 멈춰 서 아무데나 들어갔겠지만, 이제 청결한 화장실이 보장되지 않은 곳엔 못 간다. 그런 내가 조금 아쉽다.
시장에서 조금 벗어난 골목의 빵집에서 메론빵을 사먹었다. 호빵맨을 봤던 어린 시절, 메론빵이 가장 궁금했다. 물론 메론"빵"이 궁금했고, 취향은 식빵맨 (왜, 어쩔건데 - 찔려서 그러는 거 아님).
짝궁과 일본 여행을 다니면, 걷다보니 어느새 어둑해진 밤거리와 일본 특유의 신호등 소리, 개울을 건너는 다리, 도로에 번진 차량의 전조등이 있는 풍경들이 늘 남아있다. 이 날도 어느새 낮은 곳까지 내려 걸어왔고, 꽤 어두운 시간에 샌드위치 가게이자 브루어리인 Witch's Sandwich & Craft Beer Bar에 들어섰다. 꽤 동선 상 떨어진 곳에 있는 브루어리였는데, 전날 바쿠에서 마신 시즌 맥주 오필리어가 정말정말 맛있었기에, 그걸 만든 이 양조장에 안 올 수 없었고, 앉자마자 "1번이요"를 나란히 외쳤다.
운이 좋게도 매번 번역기를 돌려가면서라도 말을 걸려는 다정한 사장님들을 만난다. 우리도 띄엄띄엄한 일본어와 영어로, 여행 중이며, 오키나와에 8일째이며(여기서 많이들 놀란다), 이시가키에 다녀왔으며(여기서도 놀란다), 어제 오키나와에 왔는데 나하에 있는 펍에서 오필리어를 마시고 너무 맛있어서 이곳에 왔다, 라고 말하니, 바 저 끝쪽에 앉은 분이 오필리어를 만든 브루마스터라며 소개해주셨다. 아니 이렇게 갑자기 팬미팅을요?!?!?!?!?! 와, 와, 정말 맛있었고, 이 밸런스가 너무 좋다고, 너무 맛있는 맥주이고 케그 째 사가고 싶다고 말했지만 이날만큼 나의 부족한 일본어가, 아니 근본적으로 부족한 주접력이 아쉬운 날이 없었다. 그냥 인생 벅차 꽉다문 표정과 존경의 눈길과 엄지척으로 대신했다. 평소 크래프트 비어를 좋아하는지, 한국에 가면 어떤 브루어리에 가면 좋을지 등의 질문에 서울과 강릉, 제천의 이런저런 브루어리를 답했다. 말하면서 나도 하루빨리 그곳을 다시 가고 싶다 간절하게 생각했다. 메뉴판에 있는 도쿄와 일본의 다른 지역 브루어리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서로가 언젠가 정말 갈 수 있을지 없을지 모르는 곳이지만 언젠가 가기만 하면 좋을 곳들을 기약하며, 서로에게 최선을 다해 더듬거려서라도(그에게게도 우리에게도 낯선 영어로) 진심을 전하는 것이 참 감격스러웠다.
좋아하는 것이 있다는 건 전하고 싶고 나누고 싶다는 것이 있다는 것. 그러니 진심으로 말하고 싶어지고, 그럴 땐 외국어가 장벽이 되지 않는다.
유이레일을 타고 다시 나하 국제거리로 돌아왔다. 짝궁이 핀해둔 현립도서관을 찾아가니, 이렇게 럭셔리한 쇼핑몰 건물에 현립도서관이요?! 공공기관이 이곳에 어떻게 얼마의 임대료를 지불하고 있는 것일지 궁금했다. 있지, 뭐든 얼마일지 궁금해하는 나 자신을 볼 때 '아 찌들었다' 싶고, 재미가 없어져...
도서관엔 해외 대학 입시를 위한 코너가 꽤 본격적이라 생경했다.
추적추적 비오는 거리를 따라 걷다가 편의점에서 간단히 삼각김밥을 먹었다.
노리고 있던 아와모리 바 오픈 시간을 기다리며 꽤 오래 헤맸다.
泡盛と沖縄料理 AWAMORI+.
며칠 들었다고 익숙해지고, 이제 반가운 산신과 특유의 리듬감과 곡조의 오키나와 음악을 들어며 한들거릴 수 있었다. 좋은 바였고 열심히 마셨고 제법 괜찮았지만, 아와모리가 우리 취향이 아니란 것을 발견하는... 나름의 성과를 얻었다?! 하지만 이런 것도 먹어봐야 아는 것이기 때문에!
적당히 비를 맞으며 들어와 여행이 끝나감을 준비하며 냉장고의 술들을 털었다. 술꾼들의 나하였네.